2009년 6월 19일 금요일

노무현 대통령님 계시는 하늘에 부쳐

- 봉하마을 게시판



노무현 대통령님 계시는 하늘에 부쳐

한세상 그리울 존경 하올 노무현 대통령님!!!

대통령님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것에 너무도 비통하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납니다. 그래도 대통령님께서 남기신 올바른 사람 사는 세상의 삶에 가치와 정체성의 정신을 담아 앞으로 살아갈 남은 삶도 잘 살아보려 노력할 것입니다.

존경하올 노무현대통령님 대통령님과의 만남과 추억을 그냥저의 가슴에 묻어두고 싶었으나 이제는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아 대통령님이 계신 하늘에 이 편지를 부치고자 노무현 대통령님과 지난추억을 몇 자 적어 올립니다.

대통령님과 저와의 인연은 대통령님이 인권변호사였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때 저의 기억으로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학생들이 투옥되고 그리고 1980년 광주민주항쟁이 이후 1981년 부산의 부림 사건으로 무료변론을 맡으시면서 노무현대통령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그때 저는 부산의 당감성당에서 청년회 활동을 하던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었지요.

당시의 우리나라 시대상황은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과 암흑의 시대에 노무현대통령님과 당감성당 송기인 신부님의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고뇌하는 삶의 만남에서 저도 그 긴 인연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당감성당은 이 땅의 양심 있는 지식인 청년학생들이 모여 시국강연회와 노동자들의 노래극 문화공연을 개최하며 한 달에 한번 월례강연회가 있었는데 그때 제가 그 성당의 청년연합회 회장을 하고 있었고 당시의 강사로는 문익환 목사님 기자출신 이부영씨 오원춘 사건에 연류 되었던 전국가톨릭농민회 정호경신부님, 함세웅신부님 가톨릭 노동청년회 황상근신부님등이 초청되어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하여 우리가 함께 인식하며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내기도 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의 이런 월례강좌는 늘 긴장되고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시대적인 상황에서
그 강좌는 얼마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장기집권과 군부독재에 반대하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염원하며 특히 부산의 청년학생들이 국가보안법 집회 시위 등으로 감옥으로 유치장으로 붙들려간 이들에게 인권변호사로서 치열하게 활동했던 노무현대통령님 기억이 납니다.

이때 노무현대통령님과 송기인 신부님이 부산지역의 지식인과 청년학생들, 시민들의 민주주의 운동 시민운동이 필요하다고 절감하시고 마침내 1985년 5월3일 마침내 부산 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었고 이 기간에 노동현장의 노동자들과 청년학생 등의 인권회복을 위하여 부단한 활동을 하셨지요. 특히 1987년 6월 항쟁 때에는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대청동가톨릭센터에서 시국토론회와 가두행진을 도모하며 치열한 나날을 함께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정확하게 어느 날인지 날짜에 대한 기억은 없으나 이것만은 선명합니다.

하루는 가톨릭센터에서 국제시장으로 맨 앞에서 행진을 주도하시며 농성을 하던 중 경찰의 최루탄이 소나기 내리듯 퍼붓는 아스팔트 도로의 한복판에서 모두 몸을 피해 도망가고 남은 사람 딱 한사람 바로 “노무현 대통령님”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음날 다시 대열을 이루기 위하여 노무현대통령님을 뵈오며 가슴시리도록 눈물 나게 했습니다. 우리만 살겠다고 도망치고 대통령님 혼자만 남게 두고 도망간 나는 그날따라 왜 그렇게도 국제시장 사거리가 넓어 보였던지 송구하고 죄송했습니다. 노무현대통령님 홀로 그 자리에서 총알받이하며 앉아 계시던 그분은 이제 어디 계시는지요? 그립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노무현대통령님은 늘 무거운 십자가를 혼자 지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상임집행위원장으로 선두대열을 이끌며 그토록 치열했던 6월 항쟁은 끝나고 “나는” “아니” “우리는” 이 땅의 민주진영은 한때 각자의 진로에 대하여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잠시갈등도 했지요 그리고 마침내 민주진영의 많은 사람들과 민주시민들의 갈망을 담아 내키지 않은 정치활동에 또 다른 결단을 하셨지요. 누구나 가기 싫어하는 정치에 대중이 민중이 가난한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면 주저하지 않으셨던 노무현 대통령님은 또 그렇게 큰 걸음을 성큼 나서셨지요.

마침내 1988년 노무현대통령님은 정치활동으로 저는 빈곤지역의 빈민 활동가로 자리를 옮겨오면서 자주 뵐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언론을 통하여 때로는 알음알음으로 전해지는 사람들을 통하여 소식은 늘 듣고 있었지요. 사람 좋아하시고 사람 속에 있는 것 더욱 좋아하셨던 노무현 대통령님!!! 몇 번의 무모한 도전으로 차돌 같은 바윗돌을 깨뜨려 보려 애쓰시는 대통령님을 먼발치에서 늘 한걸음 물러나 뵈었지요.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염원하시던 이 땅의 가난한사람 노동자 도시빈민들이 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대통령이 되었을 때 나는 마치 내가 대통령이라도 된 듯 그리고 우리 편이 생겼다는 것에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아니 우리 편이 아니라도 이념이 같지 않아도 한 올바른 인간이면 모두 품어 안 어셨던 노무현대통령님!!!

2002년 대한민국대통령당선 이후 청와대 입성으로 저는 아~이제는 대통령님을 정말 뵐 수 없겠구나. 아니~그전의 노무현 변호사님을 뵐 수 없겠구나 생각했지요. 청와대 입성 후 2004년3월12일 노무현대통령님은 탄핵을 맞았을 때에 저는 실감했지요.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의를 받쳐줄 힘이 빽도 없구나!! 가슴 치며 한탄하고 지내던 어느 날 청와대 노무현대통령님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하게 되었지요. 이때에 부민협동지회가 초청을 받았지만 지금 이렇게 어려운 때 대통령님을 뵈러 가야 하느냐 아니면 가서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등 한동안 우리 안에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결단은 이렇게 어려운 때 위로를 해 드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다는 희미한 마음을 안고 청와대를 가기를 결정하여 저도 여기에 포함되어 갔습니다. 부산에서 노무현 대통령님이 계신 청와대 가던 날 우리들 부민협동지회 안에 두 가지 고민이 있었지요.


그 하나는 대통령님께 가서 위로만 하자 가장 힘든 시기인듯한데 우리마져 따져 물으면 되겠느냐 또 다른 한쪽은 아니다 그래도 바깥소식을 정확하게 전해드려야 할 것 같다. 두 가지 의견이 팽팽한 가운데 우리의 근성이 어디를 가겠습니까. 그래도 몇 가지만이라도 속 시원히 질문해 보자 그렇게 결정하며 우리는 청와대로 대통령님을 만나러 갔지요.

그때가 아마도 2004년 5월 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대통령님은 우리를 보자마자 모두 사라 진줄 알았떠이 다~ 살아있었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잠시지만 행복한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지요 그리고 대통령님도 우리도 만감이 교차하여 잠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어진 순서에 따라 청와대의 한 참모가 나서 사회를 보는가 싶더니 우리들의 질문도 이어졌습니다.

당시질문내용인즉 모두 기억하기는 어려우나 정확하게 기억이 남는 질문과
노무현 대통령님의 답변은 이랬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역시 경제문제였습니다. 경제가 왜 이리 어렵습니까?
두 번째 질문은 통일문제는 어떻게 됩니까?
세 번째 질문은 군사문제는요?

그리고 용산기지 문제는 우리누구도 질문은 하지 않았지만 노무현대통령님께서 직접언급하시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용산기지는 미군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자기영토인것 처럼 살았는데 그냥 맨입에 안 떠난다. 그래도 돈 주고 샀다. 서울시민들에게 돌려주고 싶어서 !!!

이어진 대통령님의 설명은 우리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이어 졌지요. 경제문제에 대하여 대통령님께서는 점점 좋아질 것이다. 소득 재분재 정책으로 무조건 시장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일정정도 개입하여 기업이 더 이상 뇌물이나 리베이트 없이 투명하게 경영하여 노동자들에게 복지와 임금이 되돌려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쉽지는 않다. 중산층과 부유층이 계속 재분배의 원칙에 대하여 부정적인 부분이 많다. 그래도 계속 설득해 갈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모두 이것도 급하고 저것도 급하며 재촉 하는데 시간이 필요한 부분이다. 국회의 논의도 있어야하고 때로는 국민의 동의도 얻어야 하고 모든 부분은 순서가 있다.

다음으로 통일문제는 남북한이 계속노력하고 있다. 군사문제는 국가기밀이므로 여러분들께 설명 드릴수가 없다. 군작전권은 몇 년 안에 자주국방체계를 갖추어 우리나라가 군작전통치권을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 하겠다.

이어지는 대통령님의 말씀은 여러분들이 바깥소식 들려주어서 고맙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을 걸로 안다.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대하여 이슈화만 하지 말고 대안까지 좀 고민해서 달라는 말씀까지 덧붙이시고 “자 이제 그런 이야기 그만하고 모두 어떻게 살았노” 궁금했다. 그 말씀에 모두 웃었지요! 함께 갔던 부민협동지회 사람들을 돌아가면서 안부를 물어보시며 음식을 차려놓지 말고 드세요 라며 대통령님이 제의를 하시자 모두 또 한바탕 웃었지요!

두루두루 안부를 물어 시고 난 다음 함께 간 회원 한사람이 대통령님 혹시 청와대 계시면서 힘드시면 대통령님이 쓰신 책을 보십시오. 그리고 꼭 성공한 대통령님 되십시오. 라고 하자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계시는 듯 머뭇거리시던 대통령님은 성공한 대통령되고 싶었는데. 여기 와서 보니까 성공한 대통령 될 수 없을 것 같다. 대통령님의 그 말씀 중에 우리는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날 대통령님과 헤어져 청와대를 나오면서 우리는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만이라도 우리만이라도 위로만 해 도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정해진 시간은 끝나고 노무현대통령님을 가까이에서 마지막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헤어지는데 대통령님은 우리에게 또 한 말씀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랑 뒤풀이 가고 싶은데 내가 그럴 수 없는 처지라서 미안하다. 내가 여러분들 뒤풀이 따라가면 비서진도 경호원도 퇴근시간이 늦고 신세지는 것이라 여러분 부디 건강하고 임기마치고 부산가면 편하게 막걸리 한잔하며 못 다한 이야기 그때 실컷 하자는 말씀을 끝으로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대통령님은 숙소로 우리는 부산 오는 대절버스로 오르며 참 많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대통령님 하나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부산에 도착하여 며칠 후 대통령님께 건강하시라는 짧은 내용의 편지한통을 보냈습니다. 지금생각하면 조금 더 잘 써서 보낼 걸 하는 회환이 남습니다.

그 이후 편하게 한잔하며 이야기 하자던 노무현대통령님과의 약속은 끝내 지켜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 봉화마을을 내려오신 처음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관광객이 줄을 이었고 조용해지면 한번가자며 차일피일 미루다 마침 검찰 조사 문제가 터졌고 조금 조용해지면 정말가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그만 노무현 대통령님은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존경하올 노무현 대통령님~~대통령님이 떠나신 뒤 일주일의 장례기간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미친 사람처럼 울다가 지치기도하고 부산으로 봉화로 헤집고 다녔습니다. 부산역빈소에 가도 봉화마을 빈소를 가도 마치 연극을 하고 있나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살아남은 우리들은 노무현대통령님이 바라시던 삶에 정체성을 찾아 더욱 열심히 살아 그 정신만은 놓지 않으려 마음을 다 잡아봅니다. 대통령님이 그토록 원하시던 사람 사는 세상에 작은 힘을 보태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삶에 노력을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부디 하늘나라에서 편안하시고 행복한 자유를 찾아 훨훨 사십시오.




노무현 대통령님을 그리며 2009년 6월18일


최수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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