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23일 화요일

부치지 않은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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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않은 편지

-정호승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은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지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이슬에 새벽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 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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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1일 일요일

내 마음에도 비가 내립니다

대통령님 서거 전 유시민 님이 홈페이지에 올린 글



내 마음에도 비가 내립니다

민주공화국 시민 2009/04/20 posted by 유시민


봄비가 내립니다.

농민들이 반기고, 산불 끄느라 고생하는 소방방재청 직원들이 반기고,

물 부족 걱정이 많은 수자원공사 임직원들도 반기고,

농민들을 걱정하는 모든 국민들이 함께 반기는,그야말로 귀하고 고마운 단비입니다.


지난 주말,

봉하마을에 가기로 오래 전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나중에 오는 게 좋겠다는 연락이 와서 가지 못했습니다.

제가 거기 나타나서 기자들에게 사진이 찍히고 그 사진이 신문 방송에 나가고

왜 왔는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온갖 고약한 소설이 난무하는 것이

저에게 좋지 않겠다는 판단 때문에 못오게 하신 것이겠지요.

저는 그런 것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고

문재인 실장님 혼자 변호인으로서 사저를 출입하시는 것을 보면서

친밀한 사람들이 방문하여 인간적인 위로를 나누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찾아뵙겠다고 부득부득 우기지는 못했습니다.

산과 들에는 나무와 풀과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봄비가 내리는데

제 마음 속에는 가누기 어려운 슬픔의 비가 내립니다.


대검찰청 중수부 밀실에서 진행되는 수사와 관련된 정보를

검찰이 공공연하게 또는 은밀하게 흘려 내보내면

날마다 모든 신문방송이 달려들어 수 천개의 관련기사를 쏟아내는 광경을 본 지가

벌써 2주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민주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적이 아니라 전쟁포로라고 할지라도

적장에 대해서까지 이토록 졸렬한 방법으로 모욕을 줄 수는 없는 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철저하게 법률적 대응을 하고 계신 것으로 저는 해석합니다.

그분은 지금 아무런 권력도 가지지 않은 무력한 개인에 불과합니다.

일부 언론과 정치인들은 전직대통령답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지만,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들이 전직대통령을 전직대통령답게 예우하는 것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노무현 대통령과 권여사님, 그리고 다른 가족과 친인척들이 보통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합당한 권리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윤리적인 잘못이 있었다면 그에 따르는 비판을 받아야 하고

위법행위가 있었다면 역시 그에 따르는 합당한 법률적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전직대통령은 법 위에도 법 아래도 있지 않으며,

"법앞에서 평등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번 사건과 관련된 진실은 검찰의 불법적 '피의사실 유포'와

일부 언론의 소설 쓰기식 보도의 홍수를 넘어 결국 법정에서 가려질 것입니다.

이명박 정권의 '전임 대통령 모욕주기 공작'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조금이라도 덜 상처받고 이 공작의 칼날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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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9일 금요일

노무현 대통령님 계시는 하늘에 부쳐

- 봉하마을 게시판



노무현 대통령님 계시는 하늘에 부쳐

한세상 그리울 존경 하올 노무현 대통령님!!!

대통령님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것에 너무도 비통하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납니다. 그래도 대통령님께서 남기신 올바른 사람 사는 세상의 삶에 가치와 정체성의 정신을 담아 앞으로 살아갈 남은 삶도 잘 살아보려 노력할 것입니다.

존경하올 노무현대통령님 대통령님과의 만남과 추억을 그냥저의 가슴에 묻어두고 싶었으나 이제는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아 대통령님이 계신 하늘에 이 편지를 부치고자 노무현 대통령님과 지난추억을 몇 자 적어 올립니다.

대통령님과 저와의 인연은 대통령님이 인권변호사였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때 저의 기억으로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학생들이 투옥되고 그리고 1980년 광주민주항쟁이 이후 1981년 부산의 부림 사건으로 무료변론을 맡으시면서 노무현대통령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그때 저는 부산의 당감성당에서 청년회 활동을 하던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었지요.

당시의 우리나라 시대상황은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과 암흑의 시대에 노무현대통령님과 당감성당 송기인 신부님의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고뇌하는 삶의 만남에서 저도 그 긴 인연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당감성당은 이 땅의 양심 있는 지식인 청년학생들이 모여 시국강연회와 노동자들의 노래극 문화공연을 개최하며 한 달에 한번 월례강연회가 있었는데 그때 제가 그 성당의 청년연합회 회장을 하고 있었고 당시의 강사로는 문익환 목사님 기자출신 이부영씨 오원춘 사건에 연류 되었던 전국가톨릭농민회 정호경신부님, 함세웅신부님 가톨릭 노동청년회 황상근신부님등이 초청되어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하여 우리가 함께 인식하며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내기도 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의 이런 월례강좌는 늘 긴장되고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시대적인 상황에서
그 강좌는 얼마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장기집권과 군부독재에 반대하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염원하며 특히 부산의 청년학생들이 국가보안법 집회 시위 등으로 감옥으로 유치장으로 붙들려간 이들에게 인권변호사로서 치열하게 활동했던 노무현대통령님 기억이 납니다.

이때 노무현대통령님과 송기인 신부님이 부산지역의 지식인과 청년학생들, 시민들의 민주주의 운동 시민운동이 필요하다고 절감하시고 마침내 1985년 5월3일 마침내 부산 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었고 이 기간에 노동현장의 노동자들과 청년학생 등의 인권회복을 위하여 부단한 활동을 하셨지요. 특히 1987년 6월 항쟁 때에는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대청동가톨릭센터에서 시국토론회와 가두행진을 도모하며 치열한 나날을 함께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정확하게 어느 날인지 날짜에 대한 기억은 없으나 이것만은 선명합니다.

하루는 가톨릭센터에서 국제시장으로 맨 앞에서 행진을 주도하시며 농성을 하던 중 경찰의 최루탄이 소나기 내리듯 퍼붓는 아스팔트 도로의 한복판에서 모두 몸을 피해 도망가고 남은 사람 딱 한사람 바로 “노무현 대통령님”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음날 다시 대열을 이루기 위하여 노무현대통령님을 뵈오며 가슴시리도록 눈물 나게 했습니다. 우리만 살겠다고 도망치고 대통령님 혼자만 남게 두고 도망간 나는 그날따라 왜 그렇게도 국제시장 사거리가 넓어 보였던지 송구하고 죄송했습니다. 노무현대통령님 홀로 그 자리에서 총알받이하며 앉아 계시던 그분은 이제 어디 계시는지요? 그립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노무현대통령님은 늘 무거운 십자가를 혼자 지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상임집행위원장으로 선두대열을 이끌며 그토록 치열했던 6월 항쟁은 끝나고 “나는” “아니” “우리는” 이 땅의 민주진영은 한때 각자의 진로에 대하여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잠시갈등도 했지요 그리고 마침내 민주진영의 많은 사람들과 민주시민들의 갈망을 담아 내키지 않은 정치활동에 또 다른 결단을 하셨지요. 누구나 가기 싫어하는 정치에 대중이 민중이 가난한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면 주저하지 않으셨던 노무현 대통령님은 또 그렇게 큰 걸음을 성큼 나서셨지요.

마침내 1988년 노무현대통령님은 정치활동으로 저는 빈곤지역의 빈민 활동가로 자리를 옮겨오면서 자주 뵐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언론을 통하여 때로는 알음알음으로 전해지는 사람들을 통하여 소식은 늘 듣고 있었지요. 사람 좋아하시고 사람 속에 있는 것 더욱 좋아하셨던 노무현 대통령님!!! 몇 번의 무모한 도전으로 차돌 같은 바윗돌을 깨뜨려 보려 애쓰시는 대통령님을 먼발치에서 늘 한걸음 물러나 뵈었지요.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염원하시던 이 땅의 가난한사람 노동자 도시빈민들이 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대통령이 되었을 때 나는 마치 내가 대통령이라도 된 듯 그리고 우리 편이 생겼다는 것에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아니 우리 편이 아니라도 이념이 같지 않아도 한 올바른 인간이면 모두 품어 안 어셨던 노무현대통령님!!!

2002년 대한민국대통령당선 이후 청와대 입성으로 저는 아~이제는 대통령님을 정말 뵐 수 없겠구나. 아니~그전의 노무현 변호사님을 뵐 수 없겠구나 생각했지요. 청와대 입성 후 2004년3월12일 노무현대통령님은 탄핵을 맞았을 때에 저는 실감했지요.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의를 받쳐줄 힘이 빽도 없구나!! 가슴 치며 한탄하고 지내던 어느 날 청와대 노무현대통령님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하게 되었지요. 이때에 부민협동지회가 초청을 받았지만 지금 이렇게 어려운 때 대통령님을 뵈러 가야 하느냐 아니면 가서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등 한동안 우리 안에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결단은 이렇게 어려운 때 위로를 해 드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다는 희미한 마음을 안고 청와대를 가기를 결정하여 저도 여기에 포함되어 갔습니다. 부산에서 노무현 대통령님이 계신 청와대 가던 날 우리들 부민협동지회 안에 두 가지 고민이 있었지요.


그 하나는 대통령님께 가서 위로만 하자 가장 힘든 시기인듯한데 우리마져 따져 물으면 되겠느냐 또 다른 한쪽은 아니다 그래도 바깥소식을 정확하게 전해드려야 할 것 같다. 두 가지 의견이 팽팽한 가운데 우리의 근성이 어디를 가겠습니까. 그래도 몇 가지만이라도 속 시원히 질문해 보자 그렇게 결정하며 우리는 청와대로 대통령님을 만나러 갔지요.

그때가 아마도 2004년 5월 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대통령님은 우리를 보자마자 모두 사라 진줄 알았떠이 다~ 살아있었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잠시지만 행복한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지요 그리고 대통령님도 우리도 만감이 교차하여 잠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어진 순서에 따라 청와대의 한 참모가 나서 사회를 보는가 싶더니 우리들의 질문도 이어졌습니다.

당시질문내용인즉 모두 기억하기는 어려우나 정확하게 기억이 남는 질문과
노무현 대통령님의 답변은 이랬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역시 경제문제였습니다. 경제가 왜 이리 어렵습니까?
두 번째 질문은 통일문제는 어떻게 됩니까?
세 번째 질문은 군사문제는요?

그리고 용산기지 문제는 우리누구도 질문은 하지 않았지만 노무현대통령님께서 직접언급하시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용산기지는 미군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자기영토인것 처럼 살았는데 그냥 맨입에 안 떠난다. 그래도 돈 주고 샀다. 서울시민들에게 돌려주고 싶어서 !!!

이어진 대통령님의 설명은 우리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이어 졌지요. 경제문제에 대하여 대통령님께서는 점점 좋아질 것이다. 소득 재분재 정책으로 무조건 시장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일정정도 개입하여 기업이 더 이상 뇌물이나 리베이트 없이 투명하게 경영하여 노동자들에게 복지와 임금이 되돌려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쉽지는 않다. 중산층과 부유층이 계속 재분배의 원칙에 대하여 부정적인 부분이 많다. 그래도 계속 설득해 갈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모두 이것도 급하고 저것도 급하며 재촉 하는데 시간이 필요한 부분이다. 국회의 논의도 있어야하고 때로는 국민의 동의도 얻어야 하고 모든 부분은 순서가 있다.

다음으로 통일문제는 남북한이 계속노력하고 있다. 군사문제는 국가기밀이므로 여러분들께 설명 드릴수가 없다. 군작전권은 몇 년 안에 자주국방체계를 갖추어 우리나라가 군작전통치권을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 하겠다.

이어지는 대통령님의 말씀은 여러분들이 바깥소식 들려주어서 고맙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을 걸로 안다.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대하여 이슈화만 하지 말고 대안까지 좀 고민해서 달라는 말씀까지 덧붙이시고 “자 이제 그런 이야기 그만하고 모두 어떻게 살았노” 궁금했다. 그 말씀에 모두 웃었지요! 함께 갔던 부민협동지회 사람들을 돌아가면서 안부를 물어보시며 음식을 차려놓지 말고 드세요 라며 대통령님이 제의를 하시자 모두 또 한바탕 웃었지요!

두루두루 안부를 물어 시고 난 다음 함께 간 회원 한사람이 대통령님 혹시 청와대 계시면서 힘드시면 대통령님이 쓰신 책을 보십시오. 그리고 꼭 성공한 대통령님 되십시오. 라고 하자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계시는 듯 머뭇거리시던 대통령님은 성공한 대통령되고 싶었는데. 여기 와서 보니까 성공한 대통령 될 수 없을 것 같다. 대통령님의 그 말씀 중에 우리는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날 대통령님과 헤어져 청와대를 나오면서 우리는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만이라도 우리만이라도 위로만 해 도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정해진 시간은 끝나고 노무현대통령님을 가까이에서 마지막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헤어지는데 대통령님은 우리에게 또 한 말씀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랑 뒤풀이 가고 싶은데 내가 그럴 수 없는 처지라서 미안하다. 내가 여러분들 뒤풀이 따라가면 비서진도 경호원도 퇴근시간이 늦고 신세지는 것이라 여러분 부디 건강하고 임기마치고 부산가면 편하게 막걸리 한잔하며 못 다한 이야기 그때 실컷 하자는 말씀을 끝으로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대통령님은 숙소로 우리는 부산 오는 대절버스로 오르며 참 많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대통령님 하나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부산에 도착하여 며칠 후 대통령님께 건강하시라는 짧은 내용의 편지한통을 보냈습니다. 지금생각하면 조금 더 잘 써서 보낼 걸 하는 회환이 남습니다.

그 이후 편하게 한잔하며 이야기 하자던 노무현대통령님과의 약속은 끝내 지켜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 봉화마을을 내려오신 처음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관광객이 줄을 이었고 조용해지면 한번가자며 차일피일 미루다 마침 검찰 조사 문제가 터졌고 조금 조용해지면 정말가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그만 노무현 대통령님은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존경하올 노무현 대통령님~~대통령님이 떠나신 뒤 일주일의 장례기간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미친 사람처럼 울다가 지치기도하고 부산으로 봉화로 헤집고 다녔습니다. 부산역빈소에 가도 봉화마을 빈소를 가도 마치 연극을 하고 있나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살아남은 우리들은 노무현대통령님이 바라시던 삶에 정체성을 찾아 더욱 열심히 살아 그 정신만은 놓지 않으려 마음을 다 잡아봅니다. 대통령님이 그토록 원하시던 사람 사는 세상에 작은 힘을 보태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삶에 노력을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부디 하늘나라에서 편안하시고 행복한 자유를 찾아 훨훨 사십시오.




노무현 대통령님을 그리며 2009년 6월18일


최수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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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시국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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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1318virus.net/modules/news/view.php?id=14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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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7일 수요일

'단짝' 원창희 회장이 회고하는 노무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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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의 주변 사람들에게 고인과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인지 물으면, 대부분 주저없이 원창희(63) 오앤엔통상㈜ 회장을 꼽는다. 16일 원 회장의 부산 사무실을 찾아가 그에게서 '친구 노무현'에 대해 상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인간 노무현의 참모습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며 들려준 원 회장의 회고담을 가능한 그대로 소개한다. 부산/최상원 기자 csw@hani.co.kr


상고 취업반 졸업 뒤 취직…"왜 월급 차이 납니까" 항의 뒤 사표
1963년 부산상고에 입학해서 내 친구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났어요. 그 사람은 키가 작아서 제일 앞줄에 앉았죠. 같은 반도 아닌데 쉬는 시간마다 우리 반에 놀러왔어요. 표정이 참 밝았죠. 명랑하고 농담도 잘하고.
2학년이 되면서 노무현 그 친구는 취업반으로 진학하고, 나는 진학반으로 갔어요. 졸업하고는 잠시 헤어졌죠.
친구는 부산에 있는 삼해어망이라는 조그만 회사에 취직을 했어요. 그런데 월급을 받으니까 대졸 신입사원의 절반 밖에 되지 않더랍니다. 하루는 사장에게 면담을 요청해서 따졌대요. "다 같은 일을 했는데 왜 월급이 차이가 납니까"라고. 사장이 시원하게 답을 해주지 않으니까 직장을 그만둬 버렸어요. 6개월만에요.
"고시에 붙을 때까지는 절대 안나올 끼다"
그리고는 고시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했어요. 하지만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울산으로 가서 막노동을 했어요. 당시 울산에는 온통 공사판이었으니까. 영남비료 공장을 짓는 데서 일을 했는데, 하루는 전화가 왔어요. 공사장에서 떨어져 다쳤다고. 병원에 쫓아갔더니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서 제대로 말도 못해요. 글을 써서 말을 하더군요. "부산 중부산세무서에 근무하는 큰형님(노영현·사망)에게 연락해서 이불을 보내달라"고 했어요. 퇴원하고 나서 울산 시장통에서 술을 마시며 "고시에 붙을 때까지는 절대 안나올 끼다"라고 하더군요. 그리곤 고향으로 갔어요. 노 대통령이 고시공부를 한 것은 큰형님 영향이 컸어요. 부산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시공부를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세무공무원이 됐거든요. 노 대통령이 공부할 때도 형님이 봤던 책으로 했어요.
10명서 20만원씩 모아 요트 만들었더니 '호화요트'로 둔갑
1978년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 뒤 친한 친구 네명이서 부부동반으로 다달이 계모임을 했어요. 하루는 친구가 모임에서 요트 이야기를 꺼내더라구요. "200만원만 주면 부산 구포에서 에프알피(FRP·유리섬유보강플라스틱) 요트를 만들어 주는데, 1인당 20만원씩 10명이 모아서 요트를 한대 만들자"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끌어모아 요트 2대를 만들었어요. 일요일이면 광안리해수욕장에서 요트를 탔죠. 당시 한국해양대, 부산수산대 등 대학에도 요트 동아리들이 있었는데, 정작 학생들은 요트가 없었어요. 그래서 대학생들과 함께 요트를 탔어요. 그러면 학생들은 김밥이나 막걸리를 준비해오고. 그런데 이게 나중에 언론에 보도되면서 호화요트로 둔갑을 했더라구요.
그 당시 노 대통령은 일본을 왔다갔다 하더니 일본 요트강사 자격증을 따왔어요. "대한민국 최초의 요트강사 자격증을 땄다"라며 자랑하고 다녔죠. 무슨 일을 하든지 열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요트용품 제조업에 큰돈을 투자했다가 날리기도 했어요.
1980년 쯤이었을 거예요. 하루는 권양숙 여사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요즘 건호 아빠가 뭐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집에 형사들도 찾아오고, 정보기관에서도 찾아오고. 한번 알아봐주세요."
민주화 운동 '시기상조' 충고하자 "우리 각자 인생 앞으로 가자"
그래서 친구를 광안리해수욕장 횟집에서 만나 물어봤죠.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에 푹 빠져들어 열심히 하고 있더군요. 당시 제조업을 하고 있던 나와는 생각이 많이 달라져 있었어요. 나는 열심히 설득을 했어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돼야 그런 것도 하는 것이다, 아직은 시기상조다 등등. 몇시간을 이야기하고 횟집에서 나왔는데, 헤어지면서 그러더군요. "우리 각자 인생 앞으로 가자." 서로의 인생살이가 다르니, 각자 자신의 길을 가자는 말이었죠.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지만 확고한 신념이 이미 선 사람을 더는 말리지 못했어요.
결국 1987년 구속도 되고 변호사 자격도 정지됐죠. 하루는 밤에 전화를 해서 "친구야, 먹고 살 일이 캄캄하다. 너그 회사에 취직 좀 시켜도. 먹고 살게"라며 한숨을 쉬더군요.
생각은 DJ에 공감…정치입문은 YS밑에서
1988년 제13대 총선을 앞두고 내가 "변호사 자격도 정지되고 할 일도 없는데, 니가 추구하는 것을 제도권 안에 들어가서 하면 어떻겠노"라고 권했어요. 그렇게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죠. 그런데 친구는 "디제이(김대중)와 와이에스(김영삼)를 비교해 볼 때 디제이 생각에 훨씬 공감한다"고 하더군요. 그건 내가 말렸죠. 부산에서 정치에 입문하려면 무조건 와이에스 밑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디제이와 와이에스 양쪽에서 모두 친구를 영입하려고 애썼는데, 결국 와이에스의 도움으로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어요. 어디에서 출마할 것이냐고 물었더니 "와이에스에게 부산 아무 데나 달라고 했다"고 해요. 그리곤 부산 동구로 자원해서 갔죠. 부산 최고의 강자인 허삼수가 버티고 있었는데. "군사 독재정권의 최고 실세와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이겠다"는 논리를 폈죠.
그런데 돈이 있습니까, 조직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었죠. 당시 내가 부산상고 53회 동기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졸업 20주년 기념행사를 한 직후라 동기생들의 연락처를 많이 갖고 있었죠. 그래서 동기생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소주 한병을 사더라도 동구 산복도로 구멍가게에 가서 사면서 노무현에게 한표를 찍어달라 부탁하라고. 정말 열심히 했고, 그렇게 해서 노무현 의원이 탄생했어요.
청문회 스타 된 뒤 의원직 사퇴서…최형우·김동영 등 만류로 번복서
그리고는 청문회 스타가 됐죠. 주위에 친구들이 "너 이제 대통령해도 되겠더라. 국회의원 중에 니보다 똑똑한 사람이 없더라"며 부추겼어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무척 힘들어했어요. 전국 곳곳에서 밤낮으로 민원이 들어왔어요. 노무현 정도라면 무엇이라도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유명하기만 할뿐 초선 국회의원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심한 무력감에 빠져 정말 힘들어했어요. "국회의원 그만두고 시민사회운동을 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훨씬 보탬이 되겠다"는 말도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경남 거제도의 무인도로 친구를 데려가서 텐트를 치고 이틀 동안 쉬다 왔어요. 많은 이야기를 하고 많은 생각을 했죠.
그런데 돌아와서는 국회의원 사퇴서를 내고 잠적 해버렸어요. 권여사는 말할 것도 없고, 와이에스까지 전화를 해서 친구를 찾아달라고 하더군요. 일주일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어요. 그러다 결국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틀 뒤 새벽에 권 여사가 전화를 해서 "새벽에 건호 아빠가 돌아와서 지금 자고 있는데, 좀 와주세요"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김해공항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갔어요. 우연히 그 비행기에 문재인 변호사도 탔어요. 목적지가 같더군요. 친구 집에 도착해서 조금 있으니까 민주당 의원 12명이 찾아왔어요. 최형우, 김동영 의원 등이 있었죠. 서명만 하면 되는 사퇴 번복서도 만들어 왔더군요. 의원들이 친구에서 설득을 하는데, 그때 친구의 어머니와 장모가 함께 부엌에서 귀를 쫑긋 세운 채 설겆이를 하고 있었어요. 마음이 참 안됐더라구요. 내가 담배나 한대 피우자면서 친구를 밖으로 불러 냈어요. 사표를 내면서 어머니에게 뭐라고 했냐고 물으니 "몸이 아파서 잠시 쉬기로 했습니다"라고 했다더군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자식 몸이 아파 일을 그만둔다는데 말릴 부모는 없겠지만, 앞으로 너그 어머니하고 장모는 오래 못살거다. 니가 이러는 것을 보면서 어찌 오래 살겠노. 친구가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그때 최형우 의원이 쫓아나와 "친구 이야기가 백번 맞다"며 우격다짐으로 번복서에 사인을 받아냈어요. 그런데 깜짝 놀랐어요. 당시 원내총무이던 최형우 의원이 친구에게 갑자기 큰절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번복서를 쫙쫙 찢어버려요.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노 의원. 어차피 사인한 것, 내가 불러줄테니 자필로 번복서를 써주소"라는 거예요. 그래서 자필로 번복서를 썼고, 최형우 의원은 그것을 들고 돌아갔어요. 김동영 의원은 밥을 사겠다며 우리를 식당으로 데려갔어요. 김동영 의원이 식당에서 하는 말이 "야당 오래하면 친구들에게 손을 벌릴 수 밖에 없고, 결국 가까운 친구들의 껍데기까지 벗기게 된다"며 정치인생의 회한을 털어 놓더군요.
부산시장 출마전 캐나다 여행…환경보호 눈떠
1992년도에 부산 동구에서 다시 출마했는데, 떨어졌어요. 언론에서 호화요트 기사를 낸 것이 이때였죠. 빈민가 밀집지역에서 분위기가 확 돌아섰지요. 1995년에는 부산시장 선거에 나가 또 떨어졌어요.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부인 앞에서 각서까지 썼다더군요.
부산시장 선거에 나가기 전인 1994년 여름 내가 제안을 해서 친한 친구들끼리 부부동반으로 10명이 열흘 동안 캐나다에 여행을 갔어요. 예전에 함께 계모임을 하던 친구가 캐나다 캘거리에 이민을 가서 살고 있었거든요. 노 대통령은 일본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해외에 나간 것이죠. 이때 친구가 환경보호에 눈을 떴어요. "이렇게 큰 나라도 자연을 보호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는데, 조그만 우리나라는 정말 열심히 자연을 지켜야 하겠다. 야생동물을 지키는 것도 그렇고, 여기가 정말 모범사례다"하면서 쉴 새 없이 환경보호를 강조했어요.
골프장도 이때 처음 갔어요. 해양수산부장관이 되고 나서 처음 골프를 쳤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그 전에 캐나다에서 한번 골프를 쳤죠. 이때까지 노 대통령은 골프에 대한 거부감, 나쁜 시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캐나다의 골프장을 가보고는 자연환경을 유지하면서도 골프장을 만들 수 있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죠. 권여사도 "우리도 귀국하면 골프를 배워요"라고 친구에게 권했죠. 실제로 권여사는 귀국해서 골프를 배웠는데, 친구는 바빠서 배우지 못하다, 해수부장관이 된 뒤에 배웠죠. 장관이 된 직후에 친구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친구야 머리 좀 올려도"하더군요. 정식으로 골프에 입문하겠다는 것인데, 당시 내가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창원에 있는 동기생인 강태룡 회장에게 연락해 대신 머리를 올려주게 했지요.
2001년 들어 하루는 그래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말렸죠. 안된다고. 그런데 경선을 거쳐서 하기 때문에 될 수도 있다고 해요. 그래서 대통령 후보는 될 수도 있겠다며 웃고 말았죠. 그런데 진짜로 출마 선언을 했어요. 결국 나는 모든 일을 전폐하고 도왔어요. 동문들에게도 도움을 청하고요. 모두가 열성적으로 했어요.
내가 또 물었어요. 어떤 대통령이 되고 싶냐고. 그런데 이렇게 답을 해요.
"이웃집 아저씨같은 대통령 되고 싶다"
"이웃집 아저씨같은 대통령이 되고 싶다. 경호원 한두명만 데리고 대학로에 가서 포장마차 아무 데나 들어가서 닭똥집에 소주를 마시는 대통령. 옆자리 손님과 편하게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야기 나누는 대통령. 그런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
국민들은 그런 권위 없는 대통령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더니 "권위를 확 낮춘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당선되고 나서도 도와준 많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안해요. 주변 사람에게 고맙다는 전화라도 해라고 시켜도 하지 않아요. 솔직히 많은 사람들이 섭섭해했죠. 결국 선거 캠프에 참여했던 고등학교 한해 후배 최도술씨에게 시켜서 감사편지를 사람들에게 보내게 했어요. 그제서야 사람들 마음이 많이 녹았어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것을 가식으로 생각하더군요. "고마움은 마음 속에 가지고 있어야지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에요. 정치인은 그러면 안되는데 아쉽더군요. 그 바람에 나는 사람들을 이해시키느라 애를 먹었죠.
그런데 대통령에 취임한 뒤 동기생들을 청와대에 초청한 일이 있었어요. 한사람 한사람과 옛날에 함께 겪었던 이야기들을 하는 거예요. 학교 다닐 때 다른 친구가 쓴 연애편지 내용까지 기억하고 있더라구요. 신기할 정도였죠.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만 보면 서로 통하는 신뢰,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죠.
"언론권력의 폐해 누가 막겠느냐"
대통령에 당선되고 부산에 처음 왔을 때 롯데호텔 객실에서 1시간 동안 만났어요. "청와대 들어가면 우리는 영영 못만나는 것 아이가? 앞으로 우찌 연락하모 되노?"하고 물으니까 "내 수행비서한테 전화해라. 내가 24시간 안에 니한테 전화하모 되는 것 아이가"라고 했어요. 그리고 이 약속을 한번도 어기지 않았어요. 내가 전화를 걸면, 몇시간 뒤라도 반드시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고?"하고 물어요. 무슨 일이 있겠어요.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 잠깐 하고, 힘내라 하고 그러는 것이죠. 그런데도 반드시 전화를 걸어주는 친구가 정말 고마웠어요.
친구는 남에 대해 폄하나 나쁜 말을 하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가능한 남의 장점을 보려고 노력했죠. 누가 다른 사람의 단점을 이야기 하면 "아니다. 장점이 더 많다"고 했죠. 그러면 말한 사람이 머슥해져요. 언론에서는 말을 함부로 상스럽게 한다고 비판했지만, 본인은 다른 사람이 잘 알아듣게 쉽게 말하는 것을 즐겼죠. 한마디를 해도 가슴에 와닿는 말, 평범하지만 이해하기 쉬운 말을 한 것이죠.
대통령이 되고 나서 말을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많이 말렸어요. 언론과도 잘 지내라고 했어요. 그런데 "언론권력의 폐해를 누가 막겠느냐. 내보고 대통령 하지 말라는 말이냐"며 본인의 소신을 꺾지 않았어요. 오히려 지방언론도 활성화시키고, 다양한 언로를 만들려고 했죠.
퇴임하기 1년 전쯤에 내가 물었어요. 집도 없는데 다음에 어디에서 살 거냐고.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더군요. 내가 그랬어요. 부산에 내려와라. 살아보니까 부산이 제일 살기 좋더라. 지역균형발전을 부르짖은 대통령이니까 부산으로 내려와서 살면 좋지 않느냐. 옛날에는 선비가 벼슬에게 물러나면 고향으로 내려가 후진을 양성하고 고향을 지키고 그러지 않았느냐고 했죠. 그랬더니 친구가 "야, 니 말이 맞다. 부산에 집을 한번 알아봐도" 하더군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마땅한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봉하마을로 결정했죠.
"나는 그 시계 구경도 못했다"
돌아가시기 전 검찰 수사가 진행될 때는 매일 찾아가서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는데, 친구가 전화로 그래요. "기자들이 많으니까 찾아오면 괜히 얼굴 꺼실린다. 오지마라."
돌아가시기 열흘 전에 한번 보고싶다고 연락이 와서 생선회를 준비해서 부부가 함께 봉하마을로 갔어요. 두 부부가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했죠. 일부러 검찰 수사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힘이 없어 보였어요. 허리가 아파서 오래 앉아있지 못하더군요. 중간중간에 일어나서 잠시 몸을 풀고 다시 앉곤 했어요. 오래 있어서는 안되겠다 싶어 "이제 갈란다" 했더니 "그래 가라. 나도 글 써야 한다"고 했어요. 권여사가 "내가 이 양반 힘들게 만들어 미안해요"라고 하더군요. 친구는 박연차 회장에게서 받았다고 언론에 보도된 1억원짜리 시계에 대해 "나는 그 시계 구경도 못했다"하면서 "내가 주변 사람들을 너무 힘들게 했다" 하더군요. 친구는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거짓말을 못해요. 그 친구가 몰랐다면 진짜 몰랐던 거예요. 돈 받은 사실을 말하면 불호령이 떨어지니까 권여사가 말을 못한 것이죠. 시중에서는 부부간에 모를 리가 있나라고 하지만, 그게 상식이지만, 이 부부에게는 그렇지 않았어요.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가던 날도 찾아가서 만났어요. "정치라는 것이 정말 어렵다. 주변 친구들 주머니나 털고"라며, 나를 가리키며 측근들에게 "저기 골병 든 친구 하나 있네"라고 하더군요. 옛날에 김동영 의원이 했던 말인데, 그 말을 결국 친구가 하게 되더군요.
정치인에게 후원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경제적으로 도와줄테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손 벌리지 말고 정치에 전념하라는 것 아닙니까? 언론에서 줄곧 박연차씨와 강금원씨를 노 대통령의 후원자라고 보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와서 왜 이럽니까?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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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0일 수요일

이제 '사람 세상'은 문을 닫는 것이 좋겠습니다

2009년 4월 22일 노무현 대통령의 글


‘사람세상’ 홈페이지를 닫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처음 형님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설마’했습니다.

설마 하던 기대가 무너진 다음에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용서 바랍니다.’ 이렇게 사과드리려고 했습니만, 적당한 계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형님이 하는 일을 일일이 감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변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500만불, 100만불,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제가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이미 밝혀진 사실 만으로도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명예도 도덕적 신뢰도 바닥이 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말을 했습니다.

‘아내가 한 일이다, 나는 몰랐다’ 이 말은 저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을 전들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국민들의 실망을 조금이라도 줄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정치를 떠난 몸이지만, 제 때문에 피해를 입게 될 사람들, 지금까지 저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계신 분들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습니다.

또 하나 제가 생각한 것은 피의자로서의 권리였습니다. 도덕적 파산은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피의자의 권리는 별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이라도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앞질러 가는 검찰과 언론의 추측과 단정에 반박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 상문 비서관이 ‘공금 횡령’으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이 마당에서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분노와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더 할 면목도 없습니다. 그는 저의 오랜 친구입니다. 저는 그 인연보다 그의 자세와 역량을 더 신뢰했습니다. 그 친구가 저를 위해 한 일입니다. 제가 무슨 변명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를 더욱 초라하게 하고 사람들을 더욱 노엽게만 할 것입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국민에게 고개 숙여 사죄하는 일입니다. 사실관계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나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저는 이제 이 마당에 이상 더 사건에 관한 글을 올리지 않을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에게도 동의를 구합니다. 이 마당에서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합시다. 제가 이미 인정한 사실 만으로도 저는 도덕적 명분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사람들은 공감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정치적 입장이나 도덕적 명예가 아니라 피의자의 권리를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이것도 공감을 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제가 말할 수 있는 공간은 오로지 사법절차 하나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곳에서 저를 정치적 상징이나 구심점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사건 아니라도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방향전환을 모색했으나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해 고심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 동안에 이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상 더 이대로 갈 수는 없는 사정이 되었습니다.

이상 더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적어도 한 발 물러서서 새로운 관점으로 저를 평가해 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저는 오늘 아침 이 홈페이지 관리자에게 이 사이트를 정리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관리자는 이 사이트는 개인 홈페이지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회원 여러분과 협의를 하자는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올립니다.

이제 ‘사람 세상’은 문을 닫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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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하지 마라

2009년 3월 24일 밤 노무현 대통령의 글


‘정치, 하지마라.’ 이 말은 제가 요즈음 사람들을 만나면 자주 하는 말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하는 말입니다.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하여 잃어야 하는 것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하는 목적이 권세나 명성을 좇아서 하는 것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성공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성공을 위하여 쏟아야 하는 노력과 감수해야 하는 부담을 생각하면 권세와 명성은 실속이 없고 그나마 너무 짧습니다.

이웃과 공동체, 그리고 역사를 위하여, 가치 있는 뭔가를 이루고자 정치에 뛰어든 사람이라면, 한참을 지나고 나서 그가 이룬 결과가 생각보다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열심히 싸우고, 허물고, 쌓아 올리면서 긴 세월을 달려왔지만, 그 흔적은 희미하고,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실패의 기록 뿐, 우리가 추구하던 목표는 그냥 저 멀리 있을 뿐입니다. -저는 언제 이 실패의 이야기를 글로 정리해 볼 생각입니다.-

그런데 정치를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정치에 바쳐야 합니다. 정치를 위하여 무엇을 바쳐야 하는지를 헤아리는 것보다, 그가 가진 것 중에서 정치에 바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헤아려 보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사생활, 특히 가족들의 사생활을 보호할 수 없는 것은 참으로 치명적인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까지는 스스로의 선택이니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정치인이 가는 길에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그리고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난관과 부담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거짓말의 수렁, 정치자금의 수렁, 사생활 검증의 수렁, 이전투구의 수렁, 이런 수렁들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좋은 조건을 가진 정치인이 아니고는 이 길을 회피하기가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수렁에 빠져서 정치 생명을 마감합니다. 살아남은 사람도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 많습니다. 무사히 걸어 나온 사람도 사람들의 비난, 법적인 위험, 양심의 부담, 이런 위험 부담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말년이 가난하고 외롭습니다.

거짓말의 수렁 -거짓말을 좋아하는 정치인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유권자나 참모들과 싸우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한 편으로는 상대방의 거짓말, 근거 없는 보도, 풍문에 상처를 입고 진실을 밝혀 보겠다고 발버둥치기도 하지만, 곧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감각이 무디어집니다. 고의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나중에 보면 거짓말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점차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마침내 거짓말에 익숙해집니다. 사람들은 정치인들을 소재로 우스개꺼리를 만들어 웃고 즐기고 돈벌이까지 합니다. 단지 그 정도라면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거저 농담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믿고 분노하고 경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인의 양심도 인격도 땅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어쩔 방법이 없습니다.

돈의 수렁 -돈정치는 많이 개선이 되었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치에 돈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돈을 조달할 방법은 없습니다. 이전에 비하면 후원회 제도가 많이 정비되기는 했지만, 지역을 관리하거나 열심히 일하는 의원에게는 한참 부족합니다. 원외 정치인의 사정은 참담하다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가끔 뭘 먹고 사느냐? 세금은 얼마나 냈느냐? 이런 질문이라도 받는 날이면 참으로 난감한 처지가 됩니다. 원외 정치인은 둘러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돈벌이를 할 방법도 없습니다. 국회의원에게는 연금제도도 없습니다. 결국 노후는 대책이 없습니다. 원외 정치인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물론 스스로 돈이 많은 부자이거나 샘이 깊은 후원자라도 있는 복이 많은 정치인에게는 이런 이야기는 해당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어디 많겠습니까? 또 그런 사람만 정치를 하는 나라 정치가 과연 잘될 것인지도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언젠가 정치와 돈에 관한 이야기도 글로 써볼 작정입니다.-

사생활의 노출 -정치인은 사생활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인 일도 정치인에게는 비밀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동의 자유도 없습니다. 연극을 보러 가는 일도, 골프를 치는 일도 세상 분위기와 언론의 눈치를 살펴야 합니다. 밥 먹는 자리에서 농담도 함부로 하면 사고가 납니다. 실수가 아니라도 실수가 됩니다. 저격수는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공인으로서 검증을 받는 것이야 당연하다 하겠지만, 당사자로서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나라에서는 공공의 이익과 사생활보호의 한계가 너무 모호하여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이전투구의 저주 -정치인들은 왜 그렇게 싸우는가? 이런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민주주의 정치 구조가 본시 싸우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당을 서로 나누어 싸우지 않는다면 민주주의 정치는 무너집니다. 정도의 문제일 뿐입니다. 독재 시절에는 여야의 싸움이 전쟁이었습니다. 감시하고 조사하고 죄를 씌워 감옥에 보내고 아이들 직장생활도 못하게 했습니다. 야당은 정치는 고사하고 먹고사는 것도 힘들게 했습니다. 패자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으니 전쟁인 것이지요. 그러나 민주주의에서는 싸움이 전쟁에서 게임으로 바뀌었습니다. 패자라도 정계에서 밀려나지 않고 다시 도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은 싸움입니다. 민주주의라고 싸움이 항상 규칙대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정쟁을 전쟁으로 하던 적대적 정치문화의 전통이 남아 있고, 사회적 대립과 갈등이 큰 나라에서는 자연 싸움이 거칠어지고 패자에 대한 공격도 가혹해 지기 마련입니다. 욕설, 몸싸움, 거짓말, 중상모략, 뒷조사 이런 악습이 남아 있는 이유입니다. 결국 이런 싸움판에서 싸우는 정치인들은 스스로 각박해 지고 국민들로 부터는 항상 욕을 먹는 불행한 처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독과 가난 -좀 막연한 짐작입니다. 이미 그런 처지에 빠진 정치인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옛날에는 돈을 좀 모은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보통의 정치인에게는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자녀들의 형편이나 관계도 과거와는 아주 다를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정치를 하는 동안 옛날 친구들과는 점점 멀어졌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없기도 하고, 생각과 정서도 달라지기도 하고, 손을 자주 벌려서 귀찮은 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다른 정치인들은 저와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국 돈도 친구도 없는 노후를 보낼 가능성이 어느 직업보다 높을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정말 저의 말대로 정치할 사람이 없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생기지 않겠지요? 정치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일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걱정하는 것은 정치의 신뢰가 이런 속도로 계속 떨어지면, 정치가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능을 점차 상실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90년 3당 합당 이후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를 하자고 권유를 하고 다녔습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정치인을 위한 변명’을 글로 써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지옥 같은 터널을 겨우 빠져 나왔지만, 남은 사람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독일의 어떤 정치인이 쓴 ‘정치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변명으로서 별 효과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글도 정치인을 위한 변명으로 별 효과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정치인을 위한 변명으로 이 글을 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치인을 위하여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 정치가 좀 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정치가 달라지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이 먼저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정치인의 처지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도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이 이야기를 합니다. 주인이 알아주지 않는 머슴들은 결코 훌륭한 일꾼이 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이 자존심 상한다 할까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무릅쓰고 이야기를 합니다. 다만, 해답이 아니라 문제제기입니다. 함께 생각해 보자는 제안입니다.

저의 이 이야기는 모든 정치인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좋은 조건에 있지 않은 보통의 정치인들은 거의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해당 없는 분들께는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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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살지, 살아서 싸우지 왜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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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는 없다. 전태일의 분신항거 뒤로 이소선에게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소선에게 중요한 거는 살아야 할 때 어떻게 살 것이고, 죽어야 할 때 어떻게 죽느냐다.

전태일 이후로 숱한 사람이 소외된 사람과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쳐 항거하였다. 그 소식을 접할 때 이소선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소리는 긴 한숨과 함께 “살지, 살아서 싸우지 왜 죽어”였다.







이소선이 지난 25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덕수궁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지난 토요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이소선은 긴 한숨만 내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봉화 마을까지 가려면 얼마나 가야 하냐?”

네다섯 시간은 가야 한다는 말에 이소선은 덕수궁 앞으로 가자한다. 도저히 그곳까지 갈 몸 상태가 아니라고 한다.

이소선이 덕수궁 앞 분향소로 가겠다는 이유가 또 있다.

“야, 분통이 터져서라도 덕수궁으로 가야겠다. 뭐, 국민장이라고? 지랄한다. 칼로 찔러야만 죽인 거냐? 잘못했으면 조사해서 밝히고 처리하면 되지, 검찰이라는 것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만 새면 낮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고, 언론 불러 모아놓고 이리 씹고 저리 볶아대는 게 검찰이 할 짓이냐? 이건 죽게 만든 거야. 이명박하고 검찰이 죽게 만든 거 아니냐? 이제 와서 사과도 안 하고 국민장 한다고. 순서가 맞지 않잖아. 말로만 국민장 한다면 다냐? 경찰차로 분향소 똘똘 가로막고, 이게 무슨 국민장이냐. 이명박이 죽게 한 거 먼저 사과하고 시민들 참여할 수 있게 경찰차 치우고 나서 국민장을 하든 시민장을 하든 해야지. 태일이 떠나고 40년 됐는데, 이런 정권 이런 대통령, 이리 주책없고 도리도 없는 대통령 첨 봤어. 언론들도 마찬가지야. 받아 적는 게 언론이냐. 저기 장자연인가 연예인 죽을 때도 진실도 못 밝히는 것들이 만날 죽은 사람 얼굴만 떡 하니 갖다 놓고 씨부리다 말고. 이번에는 검찰이 지랄한다고 덩달아 춤만 추고. 이게 언론이냐?”

이 말을 하기 위해서라도 덕수궁 분향소에 가는 게 맞겠다고 한다. 25일에 이소선은 덕수궁 분향소 고인의 영정 앞에 앉아 민주화 운동을 함께했던 노 전 대통령을 위해 기도를 했다. 그리고 기자들 앞에서 위에서 한 말보다 더 ‘세게’ 욕까지 덧붙여 말했다. 말을 마치고는 청와대를 쳐다보며 “나도 잡아가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소선에게는 가신 님에 대한 애틋한 기억이 가득하다. 1987년 옥포 대우조선소 이석규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을 때, 이소선은 장례위원장을 맡으며 노무현 당시 변호사와 함께하지 않았던가. 원진레이온 산업재해 사건 때도 마찬가지고.

“이석규 할 때, 노무현 변호사 할 때야, 장지로 출발하기 전에 변호사 주머니에 남아 있던 돈 2만원을 내가 홀랑 뺏지 않았냐. 변호사니까 돈 없어도 갈 수 있잖아, 하며. 내가 한푼도 없었거든. 장지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고성 삼거리에서 경찰이 몰려나오니까, 변호사가 나한테 내가 나가서 알아볼 테니 내 짐 좀 가지고 있으라며 차 밖으로 나갔는데 경찰한테 딸랑 잡혀가지 않았냐. 나는 얼른 산 속으로 도망가고. 나중에 대통령 되고 나서 무슨 기념식에서 만나니까, 이러는 거라. 엄마는 내 짐 맡아달라니까 혼자 도망가. 그래서 대통령님 이런 데서 주책없이 옛날 일을 그렇게 말하면 되겠냐고 했어. 그라니까 그런가, 하며 자기 자리로 가서 앉더라고. 참 인간적으로 격식 없이 좋은 분이었는데….”




<오도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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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9일 화요일

조기숙 前 청와대 홍보수석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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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겐 엄격하고 타인에겐 너그러웠던 대통령님
조기숙(前 청와대 홍보수석)


청와대 근무 시절, 권 여사께서 혼잣말처럼 말씀하셨다. “대통령님과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 아직까지도 대통령님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어떤 때는 나나 참모들이 잘못한 것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셔서 무서워서 말도 못하겠는데, 어떤 때는 너무 너그러우셔서 어떤 모습이 진짜 대통령의 모습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요.”
나의 대답은 비교적 단순했다.
“대통령님은 원칙주의자이시므로 행동원칙이 분명하다고 봅니다. 공적인 잘못으로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에 대해서는 심하게 꾸지람을 하시지만, 대통령님 개인에게 잘못한 사적인 실수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우신 것 같아요.”
나는 참모들 중, 대통령과의 인연이 가장 짧은 사람이다. 일면식도 없이 언론활동을 하다 부름을 받았으니 대통령과 함께 한 세월이 몇 개월밖에 되지 않는 때였다.
하지만 이심전심으로 대통령을 잘 이해하는 축에 들었는데, 아마도 리더들의 성격 연구를 많이 한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통령의 성격을 진단해서 대통령님과 여사님 앞에서 성격유형을 읽어 드렸을 때에는 어떻게 그렇게 점을 치는 것처럼 잘 맞느냐며 두 분이 무릎을 치며 크게 웃으셨다.
권 여사님은 나의 해석에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 맞아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정확한 것 같아요. 옛날에 고시 공부하실 때에는 아이들이 아빠에게 가지 말라고 해도 막 기어가서 난감했는데 대통령님은 괜찮다며 건호를 무릎에 앉히고 앉은뱅이 책상 앞에서 고시공부를 하셨어요.”
나는 자상한 아버지로서 대통령님의 면모를 그 때 처음 알았다.
"떳떳하지 못한 방법 쓰고 싶지 않다"
한 참모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대통령님 후보 시절에 방송국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TV토론 질문을 미리 얻을 수 있었어요. 한나라당 후보에게도 주었다며 노무현 후보만 손해를 보면 어떻게 하냐고 저에게 건네주는 것이었어요. 저는 아무 생각 없이 대통령님께 드리며 이것 보시고 토론 준비하시라고 말씀드렸다가 정말로 불호령을 들었습니다.”
대통령님은 당시 대강 이런 내용의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다른 후보가 질문을 미리 보든 안보든 그건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떳떳하지 못한 방법을 써서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다. TV토론을 잘 하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하면 된다. 앞으로 다시는 내게 그런 것 가지고 오지 마라.”
크게 꾸중을 들은 참모는 다시는 정정당당하지 않은 일은 말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청와대를 떠나기 한 달 전쯤, 딱 하루 지각한 날이 있었다. 새벽 1, 2시에 집에 들어와서 다시 새벽 5시 30분에 기상해서 동이 트기 전 집을 나서야 하는 생활이 무척 힘들었다. 하루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아 아침 7시쯤 사무실에 전화를 했다. 보좌관은 오전에 아무 스케줄이 없으니 천천히 나오라고 했다. 오전 8시쯤 일어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직원에게 다급한 전화가 왔다.
“큰일 났어요. 대통령님과 신년사 준비회의가 9시에 있어요.”
기자들에게 비보도를 요청해서 내가 곧 떠난다는 것이 외부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내부적으로는 그 전해 11월부터 떠날 준비를 했던 터라 나는 2006년 1월 말 예정이었던 신년사 준비팀에서 빠져 있었다. 하지만 함께 독회를 하고 연설을 다듬는 일에는 빠질 수가 없었다. 나는 홍보수석실의 책임자였고 그 일은 우리의 주요업무가 아니었던가.
순간 앞이 캄캄했다.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었는데 이 불명예를 어찌할 것인가. 실수가 거의 없었던 비서가 왜 하필 그 중요한 회의를 기록해두지 않아 나를 곤경에 빠뜨리는지 난감하기만 했다. 집이 경기 일산이다 보니 아무리 급하게 서둘러도 회의실 앞에 당도하니 15분이 늦었다.
회의 도중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도저히 대통령님 얼굴을 뵐 면목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엉덩이를 먼저 들이 밀면서 대통령과 멀지 않은 좌석에 살그머니 앉았다. 고개는 아래로 숙인 채 살짝 눈만 들어 대통령을 쳐다보다 눈이 딱 마주쳤다. 대통령은 환한 미소로 눈인사를 보내셨다. 순간 그 미안함이란 땅 속으로 꺼지고 싶었다.


반기문 외교부 장관을 경질하지 않은 이유

대통령은 참모의 잘못은 크게 꾸짖으셨어도 실수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우셨다. 가끔 여론의 질타에도 참모를 해임하지 않고 감싼 적이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이었다.
‘김선일 사건’이 터졌을 때, 전 국민이 분노했고 여론은 외교통상부 장관의 경질을 요구했다. 대통령은 일단 사건을 수습하고 책임 소재를 따져보자고 말씀하셨다. 전방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터져 국방부 장관을 해임하라는 요구가 드높았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은 어떤 원칙을 가지셨을까?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어쩔 수 없는 잘못인 경우에는 인책할 수 없다”
이것이 대통령이 남을 질책하거나 용서할 때 사용하는 잣대였다. 개인의 불성실과 불찰로 인한 심각한 과실이 아닌 경우엔 개인을 희생양으로 삼을 일이 아니며, 더구나 대통령의 정치적 위기모면을 위해 참모를 제물로 삼는 일엔 극도의 거부감을 가졌다.
또 아무리 개인적 실수라 하더라도 공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경우에는 책임을 져야겠지만 구조적 한계가 있는데도 그 때문에 대통령 개인이 상황이 어렵다고 하여 모면을 위해 책임을 묻는 일에는 대단히 엄격했다.
나의 발언에 대한 수구언론의 왜곡, 물어뜯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우리처럼 거짓말 한 번 안해 보고 교과서처럼 살아온 사람은 수구언론이 어느 정도까지 왜곡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항상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내 발언으로 인해 대통령이 곤경에 처하거나 난감하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건만 단 한 번도 질책하신 적이 없었다.
서거하시기 얼마 전에도 내가 대통령을 옹호한 발언이 조선일보의 왜곡으로 대통령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아프게 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비공개 카페에 해명 글을 올리자, 실수한 나를 더 위로하셨다.
“나보다 더 아파하는 님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옵니다. 인터뷰가 악의적으로 왜곡된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습니다.”
참모로 가까이 모실 수 있어 정말 행복했다
당신에겐 티끌만큼의 잘못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엄격했지만 타인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던 대통령님.
대통령과의 인연이 짧아 혹시 오래된 대통령 동지들이 나를 소외시키고 힘들게 할까봐 대통령은 나를 표나게 편애하셨다. 별로 잘한 일도 없는데 내가 한 조그만 일에 대해서도 대통령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몇 번씩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대통령께 이렇게 외치며 소리 놓아 울고 싶다.
“대통령님 빽 믿고 언론의 비판과 왜곡에도 조금도 기죽지 않았었는데, 대통령님 없는 세상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저의 넋과 정신적 지주를 잃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답 좀 해주세요~.”
대통령은 내가 청와대를 떠나던 날, 안 오겠다는 사람 억지로 데려다 상처만 입혀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대통령의 청와대’를 증언할 수 있게 된 것만도 영광이라며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다.
“이렇게 빨리 님의 시대를 증언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대통령님, 다시 태어나도 대통령님 참모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대통령님을 가까이서 모실 수 있어 정말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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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중....]

대선 토론회에서 사전에 질문을 빼냈다가 불호령을 들은 그 참모가 바로 접니다.조기숙 수석이 오래 전에 잊었던 일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습니다.
2002년 SBS토론회 때 일입니다.상대 후보는 질문 전체를 사전에 빼내 답변을 준비 했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듣고 있었지요.저는 노무현 후보의 성격을 알기에 질문 전체를 빼 낼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습니다.또 당시 이회창 대세론과 방송사들의 보수 경향으로 인해, 우리가 질문을 사전에 빼 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그러나 당시 담당 PD가 이미 모든 질문을 알고 있던 상대 후보와의 형평성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그래서 일말의 희망을 갖고 담당 PD에게 미리 부탁을 했습니다.“전체 질문이 아니더라고 1-2가지 난해한 질문만이라도 알려 달라”고.
그가 방송 시작 10분 전에 질문 하나를 휴대 전화로 알려 주더군요.모 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준비한 질문이었습니다.알려 준 질문을 제가 봐도 질문 자체가 난해 하고, 무엇을 물어 보는지 모르겠더군요.그래서 분장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노무현 후보에게 넌지시 질문 메모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조기숙 수석 말처럼 바로 그 자리에서 노무현 후보의 불호령을 들어야 했습니다.“사전에 질문을 알려 주지 않기로 한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지요.“상대 후보는 질문 전체를 사전에 알고 준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상대가 알고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하시더군요.

그렇게 정직하게 선거 운동을 해서 그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그렇게 정직하게 5년 동안 국정을 이끌었습니다.그러나 5년 내내 결벽증에 가까운 그의 정직성을 국민들이 알아주지 않았습니다.퇴임 후에는 이명박-검찰-조중동의 파상 공격에 파렴치범으로까지 몰렸습니다.살아있는 권력의 부당한 횡포에 그는 결국 자결을 하고 말았습니다.

부엉이 바위 위에서 투신하기 전, 노 대통령님이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자신의 진심을 몰라 주는 이 세상이 얼마나 원망스러웠까.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통한의 눈물이 흘러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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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6일 토요일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을까요' 라는 질문에 대한 유시민의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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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있다 라고 얘기 할 때...
"당장 뭐가 잘 될 것이다"라는 것은 아닙니다..
당장 뭐가 되기를 바라고 희망을 찾으면 앞이 참 깜깜해 보입니다...
희망이 있다는 것이... 내일 모레 당장 뭐가 잘 될 것이고... 믿을 수 있는 게 있기에 희망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예컨대 지금이 밤인데...
아직 밤이 열 한 시 밖에 안 됐습니다.. 빨리 날이 새야 되는데...여섯시간은 기다려야.. 날이 샐겁니다.
그러니까 해 뜨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어요... 하여튼 그 깜깜한 시기를 견뎌야 합니다.
날이 밝았을 때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그 밤 시간을 잘 보내야 합니다.
우리가 보면 지난번 6년전 대통령 선거는 사실 좀 말이 안되는 선거였습니다.
이길수가 없는 선거였는데 이긴 선거였습니다.
돌이켜보면 1987년 선거가 가장 암울한 기억입니다...1987년 12월 17일 밤.. 개표방송 출구조사 나왔을 때...
노태우 후보 압승!! 38% 득표 200만표 차이로 당선됩니다.
참 믿을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양김이 정말 원망스러웠습니다.
구로구청 마당에서 부정 투표함이라고 발견된 거... 사람들이 농성할 때...그거 앉아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 6월 항쟁 힘들게 하고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감옥가고 하면서...
대통령 직선제를 만들어 놓으니까...
"그걸 쿠데타 2인자한테 갖다 바치는 국민이 어디있냐?"
국민이 원망스러웠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에 여야 정권교체도 한 번 했고 그 정권을 5년 더 연장했고...보수정권의 역 정권교체가 일어났습니다.
1987년도에 노태우씨가 당선되는 것을 봤을때 그 절망에 비하면 지금의 절망은 별거 아닙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국민들이 속았을 수도 있고요...저는 낚였다 라고 생각합니다.
한나라당 조차도 낚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747 대운하에 낚인겁니다.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역정권교체를 너무나도 원했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길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강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딱 부합되는 인물이 이명박후보아닙니까?
747 대운하 이건 말도 안되는 공약이지만...사람들의 관심을 모았고 지지를 받아
대선 1년 반 전부터 1등해서 대선까지 간 것입니다.
한 시기의 대중의 소망과 판단이 그 쪽으로 움직인 것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걸 깨고 나올 수 있는 것은 국민 자신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잘되니까 부럽습니다....오바마...
오바마 대통령 될때 여러분 다들 좋아 하셨을겁니다...
오바마 당선 되었을 때 저도 좋았습니다... 미국사회에 희망이 있다는 것은 우리한테도 희망이 있는거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미국 국민 대단하다! 저 무명인사를... 4년 전만 해도 전당대회장에서 자리도 못 받아 밖에서 겉돌던... 촌뜨기를...
워싱턴 백악관 가는 길도 잘 모르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미국 국민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민이 벌써 6년 전에 한 겁니다... 자기 국민이 한 것은 우습게 여기고...
광신도니 뭐니 하면서...외국에서 한 건 엄청 띄웁니다..
오바마 지지자들이 한 것이 2002년 노사모가 한 것과 똑같은 겁니다...
노사모가 한 것은 일시적으로 갑자기 뭉친거고... 오바마를 만들어 낸 네트워크는 민주당의 오랜된 풀뿌리가 만들어 낸 거고...
그 차이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더 위대하죠~
약체 선수들...연봉 다 합쳐 70억 밖에 안되는 선수를 데리고가서 WBC 결승전 올라 간 게 더 위대하지...
연봉 합쳐 천 몇 백 억되는 선수로 우승한 게 더 값진가요?
아무런 사회적 기초가 없는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결집해서 그만한 일을 한 것이 제가 볼 때는 더 대단합니다.
그런데...
자기 나라의 역사의 대단함은 광신도 노빠 이렇게 해서 엄청 비하하면서...
그거 보다 더 늦게 그와 비슷한 것을 한 외국에 대해서 진보 보수를 불문하고 엄청 띄웁니다...
미국대통령한테 잘 보이려 그러는지...
진보는 진짜 좋아서 띄우고... 보수는 잘 보이려고 띄우고... 전부 다 띄웁니다...
한심해 보입니다. 왜 우리는 우리 것을 소중히 여기지 못할까?
지금 미국 행정부에서 하려는 게...참여 정부가 5년 내내 고민했던 내용들입니다...
사람 중심 투자 이런 것들... 국가 비젼 2030....
그거 나왔을 때 대한민국 진보지식인들도 전부 다 발로 밟았습니다...
그거하고 거의 내용이 비슷한 미국의 오바마 경제고문이 쓴 책 이런 건 막 띄웁니다...
왜? 우리나라 것에 대해선 거의 비슷한 기조를 가지고 있고 우리에게 필요한 내용의 정책은..
보수 언론에서 세금폭탄이라고 해버리면 모두 다 동조해서 본 척 만 척 하면서...
왜 미국에서 나온 것은 그렇게 띄울까?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이 탄생하기까지 무엇이 필요했습니까?
부시 8년이 필요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을 탄생시키는 과정이 부시 8년입니다.
이라크 전쟁....911 테러... 아프간 전쟁...
전 세계를 불바다로 만들고 미국의 쌍둥이 빌딩이 Ground Zero가 되게 그 사태를 일으키고
그리고 이라크를 침공하고 세계를 금융공황으로 빠뜨린 이 모든 것들이 부시 8년동안 일어났고..
그 바탕위에서 오바마가 탄생한겁니다...
그런 8년속에서도 득표율을 보면 53:47... 5% 차이 밖에 안됩니다..
미국 국민이 한 일이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8년 동안 그렇게 당하고 그것도 못한다면 미국 국민은 자격이 없는 겁니다.
미국 국민은 민주주의 본산에 해당하는 현대의 민주 국가로서 해야 마땅한 최소한의 것을 한 겁니다. 미국 국민은...
그렇지만 위대한겁니다... 위대한 선택을 준비하는 과정이 부시의 8년이었습니다.

그것과 비교하면 이명박 정부의 1년 이라는 것은 조족지혈입니다... 아직까지는...
국민 대중이 한번 한 판단을 바꾸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과 일들이 필요한겁니다...
우리 국민들이 이명박대통령 국정 지지도가 30% 미만이라고 해서 판단을 바꾼 게 아닙니다.
지금도 2007년 2008년 대선과 총선의 흐름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판단을 바꾸는 데는 많이 세월이 필요합니다. 그세월 동안에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더 많은 일들이 벌어질수 있습니다.
지난 1년동안 벌어진 일들은 별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이 희망이 없는 나라냐? 그렇지 않습니다.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밤이 무서우면 무서울수록 아침이 오는 게 반갑습니다.
어찌보면 아직도 우리 국민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아침을 간절히 바라지 않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이 그럭저럭 살만한 세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투표도 계속 안하다 보면 언젠가는 해야겠다는 자각이 싹트는 날이 옵니다.
지금은 이 소중한 권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잊어버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대중은 누가 계몽할 수가 없습니다.
국민들은 스스로를 계몽합니다.
자기자신의 개인적 집단적 경험을 통해서
또는 개별적 학습을 통해서 그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자기 스스로를 계몽해 나가고
자기 스스로 깨우쳐 나가고
자기 스스로 자기 발로 앞으로 걸어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암담해 보이지만 이것은 별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물대포 쏘고 일요일날 아침에 기자들 잡아가고 그래도
거꾸로 달아 매고 고춧가루 물을 먹이지는 못합니다...
박정희씨나 전두환씨가 대통령 때 했던 일에 비하면 거의 장난감 총을 다루는 수준입니다.
앞으로 훨씬 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 휠씬 암담해 보이는 사회현상들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희망이 없느냐?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자꾸 자꾸 밤이 깊어가면 더욱더 찬란한 새벽이 오려나 보다 라고 생각하면서
여유를 가지고
짜증내지말고
숨 길게 내 쉬고 길게 들여 마시고
걸어 다닐 때도 천천히 걸어 다니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뛰어 다니면 밤이 길텐데 밤을 견디지를 못합니다.
질긴 놈이 이깁니다.
밀물이 들어오면 모든 배들이 한꺼번에 떠오릅니다.
역사의 밀물이 들면 모든 진보의 배들이 한꺼번에 떠오릅니다.
희망이라는 것도 숨을 얼마나 길게 쉬느냐에 따라서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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