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28일 월요일

김인국 신부의 평화방송 인터뷰


.

김인국 신부 "정운찬, 어떻게 그런 무서운 말을…"


평화방송 출연 "화염병이 용산 원인" 발언 반박…"유가족들 눈물 닦아 드려야"


2009년 09월 21일 (월) 12:33:34
최훈길 기자 (
chamnamu@mediatoday.co.kr)



김인국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가 21일 정운찬 국무총리 후보자의 "용산 사고는 화염병이 직접 원인" 발언 대해 "따질 건 따지고 달랠 거는 달래야 하는데 이 분이 하는 말씀은 가끔 네비게이션이 바보 같은 소리 할 때 같다"며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김신부는 이날 오전 평화방송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에 출연해 정 후보자의 '화염병' 발언에 대해 "오늘과 같은 이런 거짓말은 용서가 안 된다"며 "아니 자기가 수사관도 아닌데 어떻게 속 내용을 다 알아서 그런 무서운 말을 확신을 담아서 결정적으로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다.


▲ 김인국 신부. 이치열 기자 truth710@


김신부는 "△정말 화염병이 참사의 원인이었다면, 희생자들이 불에 타 죽었어야 하는데 왜 시신이 그렇게 무참히 훼손되었을까. △이빨은 다 부서지고 두개골은 처참하게 함몰이 되고, 불에 타 죽었다는 사람의 손목과 발목은 왜 풀이 잘리듯 그렇게 싹둑 잘렸을까. △검찰은 왜 부검을 한다면서 희생자들의 살점과 내장을 다 드러냈을까. △극한의 망루에서 살아 내려온 사람이 나중에 주검이 되어서 나온 이유는 무얼까"라고 물으며 "하도 이런 일들이 기가 막히니까 유가족들이 시신 사진이라도 공개해서 진실을 밝히고 싶다는 거 아닙니까"라고 지적했다.


김신부는 "'화염병 투척이 원인일까' 아니면 '과격 진압이 원인일까' 원인이 서로 갈린다. 그러면 어떤 게 진실인지 가려야 한다"며 "이런 결정적인 의문에 답을 내리지 못하면서 '수사 기록은 개인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내놓을 수 없다'는 이런 엉뚱한 소리를 자꾸 늘어놓으시면 큰 죄에 더 무거운 죄를 보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신부는 정 후보자가 검찰 수사 기록 공개를 사실상 거부한 것을 두고 "수사기록 3000쪽을 내놓으면 진실이 대번에 가려지고 그렇게 되면 유가족들이 승복을 하든지 명예회복을 요구하든지 해서 장례를 치를 수 있는데 왜 그 손쉬운 해법을 외면하는 건지 묻고 싶다. 총리 후보자 한 번 대답해 보세요"라고 촉구했다.

김신부는 정 후보자의 '가족과 조합간에 당사자간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이 최선'이라는 답변에 대해서도 "일은 정부가 저질러 놓고 이제 와서 조합이랑 해결하라? 아니 그런 생각이면 왜 처음부터 정부가 개입하지 말았어야 한다"며 "망루에 올라간 지 겨우 하루 만에 특공경찰들을 몰고 가서 그런 무서운 짓을 벌여놓고 이제 와서 조합하고 이야기하라고요? 아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의 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고 싶다"고 밝혔다.


김인국 신부는 또 "수사 기록 내 놓으시고, 시비를 가리시고, 그래서 '유가족을 달래든지', '벌 주시든지' 해서 종결을 지어야지 추석이 내일 모레인데 아직까지 이렇게 끌고 있는 게 이게 인륜에 맞는 일입니까"라며 "설령 유가족들의 주장이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무시하시면 그거는 참 잘못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김인국 신부는 "(용산참사는)정권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이걸 드러내면 정권의 정당성 자체가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대통령부터 정말로 진심 어린 친서민 행보라면 가셔야 한다. 가셔서 유가족들 눈물 닦아 드리셔야 한다. 안아주셔야 한다. 그리고 시비를 가려보겠다고 하셔야 한다. 혹시 또 정부에 책임이 있으면 진심으로 사과하면 된다. 왜 그걸 못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앞서 정운찬 후보자는 인사청문회 서면답변서에서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이 '후보자는 용산 참사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살인진압 경찰 책임자들을 처벌하고 국민들께 사죄할 의향이 있는지' 묻자 "매우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나 농성자들이 다량의 시너를 투기한 상태에서 경찰특공대를 향해 투척한 화염병이 사고의 직접적 원인"이라며 사실상 거부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최초입력 : 2009-09-21 12:33:34 최종수정 : 0000-00-00 00:00:00

2009년 6월 23일 화요일

부치지 않은 편지

.

















부치지 않은 편지

-정호승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은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지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이슬에 새벽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 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

2009년 6월 21일 일요일

내 마음에도 비가 내립니다

대통령님 서거 전 유시민 님이 홈페이지에 올린 글



내 마음에도 비가 내립니다

민주공화국 시민 2009/04/20 posted by 유시민


봄비가 내립니다.

농민들이 반기고, 산불 끄느라 고생하는 소방방재청 직원들이 반기고,

물 부족 걱정이 많은 수자원공사 임직원들도 반기고,

농민들을 걱정하는 모든 국민들이 함께 반기는,그야말로 귀하고 고마운 단비입니다.


지난 주말,

봉하마을에 가기로 오래 전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나중에 오는 게 좋겠다는 연락이 와서 가지 못했습니다.

제가 거기 나타나서 기자들에게 사진이 찍히고 그 사진이 신문 방송에 나가고

왜 왔는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온갖 고약한 소설이 난무하는 것이

저에게 좋지 않겠다는 판단 때문에 못오게 하신 것이겠지요.

저는 그런 것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고

문재인 실장님 혼자 변호인으로서 사저를 출입하시는 것을 보면서

친밀한 사람들이 방문하여 인간적인 위로를 나누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찾아뵙겠다고 부득부득 우기지는 못했습니다.

산과 들에는 나무와 풀과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봄비가 내리는데

제 마음 속에는 가누기 어려운 슬픔의 비가 내립니다.


대검찰청 중수부 밀실에서 진행되는 수사와 관련된 정보를

검찰이 공공연하게 또는 은밀하게 흘려 내보내면

날마다 모든 신문방송이 달려들어 수 천개의 관련기사를 쏟아내는 광경을 본 지가

벌써 2주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민주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적이 아니라 전쟁포로라고 할지라도

적장에 대해서까지 이토록 졸렬한 방법으로 모욕을 줄 수는 없는 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철저하게 법률적 대응을 하고 계신 것으로 저는 해석합니다.

그분은 지금 아무런 권력도 가지지 않은 무력한 개인에 불과합니다.

일부 언론과 정치인들은 전직대통령답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지만,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들이 전직대통령을 전직대통령답게 예우하는 것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노무현 대통령과 권여사님, 그리고 다른 가족과 친인척들이 보통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합당한 권리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윤리적인 잘못이 있었다면 그에 따르는 비판을 받아야 하고

위법행위가 있었다면 역시 그에 따르는 합당한 법률적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전직대통령은 법 위에도 법 아래도 있지 않으며,

"법앞에서 평등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번 사건과 관련된 진실은 검찰의 불법적 '피의사실 유포'와

일부 언론의 소설 쓰기식 보도의 홍수를 넘어 결국 법정에서 가려질 것입니다.

이명박 정권의 '전임 대통령 모욕주기 공작'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조금이라도 덜 상처받고 이 공작의 칼날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


2009년 6월 19일 금요일

노무현 대통령님 계시는 하늘에 부쳐

- 봉하마을 게시판



노무현 대통령님 계시는 하늘에 부쳐

한세상 그리울 존경 하올 노무현 대통령님!!!

대통령님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것에 너무도 비통하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납니다. 그래도 대통령님께서 남기신 올바른 사람 사는 세상의 삶에 가치와 정체성의 정신을 담아 앞으로 살아갈 남은 삶도 잘 살아보려 노력할 것입니다.

존경하올 노무현대통령님 대통령님과의 만남과 추억을 그냥저의 가슴에 묻어두고 싶었으나 이제는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아 대통령님이 계신 하늘에 이 편지를 부치고자 노무현 대통령님과 지난추억을 몇 자 적어 올립니다.

대통령님과 저와의 인연은 대통령님이 인권변호사였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때 저의 기억으로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학생들이 투옥되고 그리고 1980년 광주민주항쟁이 이후 1981년 부산의 부림 사건으로 무료변론을 맡으시면서 노무현대통령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그때 저는 부산의 당감성당에서 청년회 활동을 하던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었지요.

당시의 우리나라 시대상황은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과 암흑의 시대에 노무현대통령님과 당감성당 송기인 신부님의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고뇌하는 삶의 만남에서 저도 그 긴 인연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당감성당은 이 땅의 양심 있는 지식인 청년학생들이 모여 시국강연회와 노동자들의 노래극 문화공연을 개최하며 한 달에 한번 월례강연회가 있었는데 그때 제가 그 성당의 청년연합회 회장을 하고 있었고 당시의 강사로는 문익환 목사님 기자출신 이부영씨 오원춘 사건에 연류 되었던 전국가톨릭농민회 정호경신부님, 함세웅신부님 가톨릭 노동청년회 황상근신부님등이 초청되어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하여 우리가 함께 인식하며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내기도 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의 이런 월례강좌는 늘 긴장되고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시대적인 상황에서
그 강좌는 얼마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장기집권과 군부독재에 반대하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염원하며 특히 부산의 청년학생들이 국가보안법 집회 시위 등으로 감옥으로 유치장으로 붙들려간 이들에게 인권변호사로서 치열하게 활동했던 노무현대통령님 기억이 납니다.

이때 노무현대통령님과 송기인 신부님이 부산지역의 지식인과 청년학생들, 시민들의 민주주의 운동 시민운동이 필요하다고 절감하시고 마침내 1985년 5월3일 마침내 부산 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었고 이 기간에 노동현장의 노동자들과 청년학생 등의 인권회복을 위하여 부단한 활동을 하셨지요. 특히 1987년 6월 항쟁 때에는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대청동가톨릭센터에서 시국토론회와 가두행진을 도모하며 치열한 나날을 함께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정확하게 어느 날인지 날짜에 대한 기억은 없으나 이것만은 선명합니다.

하루는 가톨릭센터에서 국제시장으로 맨 앞에서 행진을 주도하시며 농성을 하던 중 경찰의 최루탄이 소나기 내리듯 퍼붓는 아스팔트 도로의 한복판에서 모두 몸을 피해 도망가고 남은 사람 딱 한사람 바로 “노무현 대통령님”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음날 다시 대열을 이루기 위하여 노무현대통령님을 뵈오며 가슴시리도록 눈물 나게 했습니다. 우리만 살겠다고 도망치고 대통령님 혼자만 남게 두고 도망간 나는 그날따라 왜 그렇게도 국제시장 사거리가 넓어 보였던지 송구하고 죄송했습니다. 노무현대통령님 홀로 그 자리에서 총알받이하며 앉아 계시던 그분은 이제 어디 계시는지요? 그립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노무현대통령님은 늘 무거운 십자가를 혼자 지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상임집행위원장으로 선두대열을 이끌며 그토록 치열했던 6월 항쟁은 끝나고 “나는” “아니” “우리는” 이 땅의 민주진영은 한때 각자의 진로에 대하여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잠시갈등도 했지요 그리고 마침내 민주진영의 많은 사람들과 민주시민들의 갈망을 담아 내키지 않은 정치활동에 또 다른 결단을 하셨지요. 누구나 가기 싫어하는 정치에 대중이 민중이 가난한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면 주저하지 않으셨던 노무현 대통령님은 또 그렇게 큰 걸음을 성큼 나서셨지요.

마침내 1988년 노무현대통령님은 정치활동으로 저는 빈곤지역의 빈민 활동가로 자리를 옮겨오면서 자주 뵐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언론을 통하여 때로는 알음알음으로 전해지는 사람들을 통하여 소식은 늘 듣고 있었지요. 사람 좋아하시고 사람 속에 있는 것 더욱 좋아하셨던 노무현 대통령님!!! 몇 번의 무모한 도전으로 차돌 같은 바윗돌을 깨뜨려 보려 애쓰시는 대통령님을 먼발치에서 늘 한걸음 물러나 뵈었지요.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염원하시던 이 땅의 가난한사람 노동자 도시빈민들이 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대통령이 되었을 때 나는 마치 내가 대통령이라도 된 듯 그리고 우리 편이 생겼다는 것에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아니 우리 편이 아니라도 이념이 같지 않아도 한 올바른 인간이면 모두 품어 안 어셨던 노무현대통령님!!!

2002년 대한민국대통령당선 이후 청와대 입성으로 저는 아~이제는 대통령님을 정말 뵐 수 없겠구나. 아니~그전의 노무현 변호사님을 뵐 수 없겠구나 생각했지요. 청와대 입성 후 2004년3월12일 노무현대통령님은 탄핵을 맞았을 때에 저는 실감했지요.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의를 받쳐줄 힘이 빽도 없구나!! 가슴 치며 한탄하고 지내던 어느 날 청와대 노무현대통령님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하게 되었지요. 이때에 부민협동지회가 초청을 받았지만 지금 이렇게 어려운 때 대통령님을 뵈러 가야 하느냐 아니면 가서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등 한동안 우리 안에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결단은 이렇게 어려운 때 위로를 해 드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다는 희미한 마음을 안고 청와대를 가기를 결정하여 저도 여기에 포함되어 갔습니다. 부산에서 노무현 대통령님이 계신 청와대 가던 날 우리들 부민협동지회 안에 두 가지 고민이 있었지요.


그 하나는 대통령님께 가서 위로만 하자 가장 힘든 시기인듯한데 우리마져 따져 물으면 되겠느냐 또 다른 한쪽은 아니다 그래도 바깥소식을 정확하게 전해드려야 할 것 같다. 두 가지 의견이 팽팽한 가운데 우리의 근성이 어디를 가겠습니까. 그래도 몇 가지만이라도 속 시원히 질문해 보자 그렇게 결정하며 우리는 청와대로 대통령님을 만나러 갔지요.

그때가 아마도 2004년 5월 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대통령님은 우리를 보자마자 모두 사라 진줄 알았떠이 다~ 살아있었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잠시지만 행복한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지요 그리고 대통령님도 우리도 만감이 교차하여 잠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어진 순서에 따라 청와대의 한 참모가 나서 사회를 보는가 싶더니 우리들의 질문도 이어졌습니다.

당시질문내용인즉 모두 기억하기는 어려우나 정확하게 기억이 남는 질문과
노무현 대통령님의 답변은 이랬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역시 경제문제였습니다. 경제가 왜 이리 어렵습니까?
두 번째 질문은 통일문제는 어떻게 됩니까?
세 번째 질문은 군사문제는요?

그리고 용산기지 문제는 우리누구도 질문은 하지 않았지만 노무현대통령님께서 직접언급하시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용산기지는 미군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자기영토인것 처럼 살았는데 그냥 맨입에 안 떠난다. 그래도 돈 주고 샀다. 서울시민들에게 돌려주고 싶어서 !!!

이어진 대통령님의 설명은 우리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이어 졌지요. 경제문제에 대하여 대통령님께서는 점점 좋아질 것이다. 소득 재분재 정책으로 무조건 시장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일정정도 개입하여 기업이 더 이상 뇌물이나 리베이트 없이 투명하게 경영하여 노동자들에게 복지와 임금이 되돌려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쉽지는 않다. 중산층과 부유층이 계속 재분배의 원칙에 대하여 부정적인 부분이 많다. 그래도 계속 설득해 갈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모두 이것도 급하고 저것도 급하며 재촉 하는데 시간이 필요한 부분이다. 국회의 논의도 있어야하고 때로는 국민의 동의도 얻어야 하고 모든 부분은 순서가 있다.

다음으로 통일문제는 남북한이 계속노력하고 있다. 군사문제는 국가기밀이므로 여러분들께 설명 드릴수가 없다. 군작전권은 몇 년 안에 자주국방체계를 갖추어 우리나라가 군작전통치권을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 하겠다.

이어지는 대통령님의 말씀은 여러분들이 바깥소식 들려주어서 고맙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을 걸로 안다.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대하여 이슈화만 하지 말고 대안까지 좀 고민해서 달라는 말씀까지 덧붙이시고 “자 이제 그런 이야기 그만하고 모두 어떻게 살았노” 궁금했다. 그 말씀에 모두 웃었지요! 함께 갔던 부민협동지회 사람들을 돌아가면서 안부를 물어보시며 음식을 차려놓지 말고 드세요 라며 대통령님이 제의를 하시자 모두 또 한바탕 웃었지요!

두루두루 안부를 물어 시고 난 다음 함께 간 회원 한사람이 대통령님 혹시 청와대 계시면서 힘드시면 대통령님이 쓰신 책을 보십시오. 그리고 꼭 성공한 대통령님 되십시오. 라고 하자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계시는 듯 머뭇거리시던 대통령님은 성공한 대통령되고 싶었는데. 여기 와서 보니까 성공한 대통령 될 수 없을 것 같다. 대통령님의 그 말씀 중에 우리는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날 대통령님과 헤어져 청와대를 나오면서 우리는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만이라도 우리만이라도 위로만 해 도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정해진 시간은 끝나고 노무현대통령님을 가까이에서 마지막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헤어지는데 대통령님은 우리에게 또 한 말씀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랑 뒤풀이 가고 싶은데 내가 그럴 수 없는 처지라서 미안하다. 내가 여러분들 뒤풀이 따라가면 비서진도 경호원도 퇴근시간이 늦고 신세지는 것이라 여러분 부디 건강하고 임기마치고 부산가면 편하게 막걸리 한잔하며 못 다한 이야기 그때 실컷 하자는 말씀을 끝으로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대통령님은 숙소로 우리는 부산 오는 대절버스로 오르며 참 많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대통령님 하나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부산에 도착하여 며칠 후 대통령님께 건강하시라는 짧은 내용의 편지한통을 보냈습니다. 지금생각하면 조금 더 잘 써서 보낼 걸 하는 회환이 남습니다.

그 이후 편하게 한잔하며 이야기 하자던 노무현대통령님과의 약속은 끝내 지켜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 봉화마을을 내려오신 처음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관광객이 줄을 이었고 조용해지면 한번가자며 차일피일 미루다 마침 검찰 조사 문제가 터졌고 조금 조용해지면 정말가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그만 노무현 대통령님은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존경하올 노무현 대통령님~~대통령님이 떠나신 뒤 일주일의 장례기간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미친 사람처럼 울다가 지치기도하고 부산으로 봉화로 헤집고 다녔습니다. 부산역빈소에 가도 봉화마을 빈소를 가도 마치 연극을 하고 있나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살아남은 우리들은 노무현대통령님이 바라시던 삶에 정체성을 찾아 더욱 열심히 살아 그 정신만은 놓지 않으려 마음을 다 잡아봅니다. 대통령님이 그토록 원하시던 사람 사는 세상에 작은 힘을 보태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삶에 노력을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부디 하늘나라에서 편안하시고 행복한 자유를 찾아 훨훨 사십시오.




노무현 대통령님을 그리며 2009년 6월18일


최수연 올림


.

청소년 시국선언

.



http://www.1318virus.net/modules/news/view.php?id=14221



.

2009년 6월 17일 수요일

'단짝' 원창희 회장이 회고하는 노무현 대통령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주변 사람들에게 고인과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인지 물으면, 대부분 주저없이 원창희(63) 오앤엔통상㈜ 회장을 꼽는다. 16일 원 회장의 부산 사무실을 찾아가 그에게서 '친구 노무현'에 대해 상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인간 노무현의 참모습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며 들려준 원 회장의 회고담을 가능한 그대로 소개한다. 부산/최상원 기자 csw@hani.co.kr


상고 취업반 졸업 뒤 취직…"왜 월급 차이 납니까" 항의 뒤 사표
1963년 부산상고에 입학해서 내 친구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났어요. 그 사람은 키가 작아서 제일 앞줄에 앉았죠. 같은 반도 아닌데 쉬는 시간마다 우리 반에 놀러왔어요. 표정이 참 밝았죠. 명랑하고 농담도 잘하고.
2학년이 되면서 노무현 그 친구는 취업반으로 진학하고, 나는 진학반으로 갔어요. 졸업하고는 잠시 헤어졌죠.
친구는 부산에 있는 삼해어망이라는 조그만 회사에 취직을 했어요. 그런데 월급을 받으니까 대졸 신입사원의 절반 밖에 되지 않더랍니다. 하루는 사장에게 면담을 요청해서 따졌대요. "다 같은 일을 했는데 왜 월급이 차이가 납니까"라고. 사장이 시원하게 답을 해주지 않으니까 직장을 그만둬 버렸어요. 6개월만에요.
"고시에 붙을 때까지는 절대 안나올 끼다"
그리고는 고시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했어요. 하지만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울산으로 가서 막노동을 했어요. 당시 울산에는 온통 공사판이었으니까. 영남비료 공장을 짓는 데서 일을 했는데, 하루는 전화가 왔어요. 공사장에서 떨어져 다쳤다고. 병원에 쫓아갔더니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서 제대로 말도 못해요. 글을 써서 말을 하더군요. "부산 중부산세무서에 근무하는 큰형님(노영현·사망)에게 연락해서 이불을 보내달라"고 했어요. 퇴원하고 나서 울산 시장통에서 술을 마시며 "고시에 붙을 때까지는 절대 안나올 끼다"라고 하더군요. 그리곤 고향으로 갔어요. 노 대통령이 고시공부를 한 것은 큰형님 영향이 컸어요. 부산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시공부를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세무공무원이 됐거든요. 노 대통령이 공부할 때도 형님이 봤던 책으로 했어요.
10명서 20만원씩 모아 요트 만들었더니 '호화요트'로 둔갑
1978년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 뒤 친한 친구 네명이서 부부동반으로 다달이 계모임을 했어요. 하루는 친구가 모임에서 요트 이야기를 꺼내더라구요. "200만원만 주면 부산 구포에서 에프알피(FRP·유리섬유보강플라스틱) 요트를 만들어 주는데, 1인당 20만원씩 10명이 모아서 요트를 한대 만들자"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끌어모아 요트 2대를 만들었어요. 일요일이면 광안리해수욕장에서 요트를 탔죠. 당시 한국해양대, 부산수산대 등 대학에도 요트 동아리들이 있었는데, 정작 학생들은 요트가 없었어요. 그래서 대학생들과 함께 요트를 탔어요. 그러면 학생들은 김밥이나 막걸리를 준비해오고. 그런데 이게 나중에 언론에 보도되면서 호화요트로 둔갑을 했더라구요.
그 당시 노 대통령은 일본을 왔다갔다 하더니 일본 요트강사 자격증을 따왔어요. "대한민국 최초의 요트강사 자격증을 땄다"라며 자랑하고 다녔죠. 무슨 일을 하든지 열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요트용품 제조업에 큰돈을 투자했다가 날리기도 했어요.
1980년 쯤이었을 거예요. 하루는 권양숙 여사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요즘 건호 아빠가 뭐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집에 형사들도 찾아오고, 정보기관에서도 찾아오고. 한번 알아봐주세요."
민주화 운동 '시기상조' 충고하자 "우리 각자 인생 앞으로 가자"
그래서 친구를 광안리해수욕장 횟집에서 만나 물어봤죠.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에 푹 빠져들어 열심히 하고 있더군요. 당시 제조업을 하고 있던 나와는 생각이 많이 달라져 있었어요. 나는 열심히 설득을 했어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돼야 그런 것도 하는 것이다, 아직은 시기상조다 등등. 몇시간을 이야기하고 횟집에서 나왔는데, 헤어지면서 그러더군요. "우리 각자 인생 앞으로 가자." 서로의 인생살이가 다르니, 각자 자신의 길을 가자는 말이었죠.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지만 확고한 신념이 이미 선 사람을 더는 말리지 못했어요.
결국 1987년 구속도 되고 변호사 자격도 정지됐죠. 하루는 밤에 전화를 해서 "친구야, 먹고 살 일이 캄캄하다. 너그 회사에 취직 좀 시켜도. 먹고 살게"라며 한숨을 쉬더군요.
생각은 DJ에 공감…정치입문은 YS밑에서
1988년 제13대 총선을 앞두고 내가 "변호사 자격도 정지되고 할 일도 없는데, 니가 추구하는 것을 제도권 안에 들어가서 하면 어떻겠노"라고 권했어요. 그렇게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죠. 그런데 친구는 "디제이(김대중)와 와이에스(김영삼)를 비교해 볼 때 디제이 생각에 훨씬 공감한다"고 하더군요. 그건 내가 말렸죠. 부산에서 정치에 입문하려면 무조건 와이에스 밑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디제이와 와이에스 양쪽에서 모두 친구를 영입하려고 애썼는데, 결국 와이에스의 도움으로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어요. 어디에서 출마할 것이냐고 물었더니 "와이에스에게 부산 아무 데나 달라고 했다"고 해요. 그리곤 부산 동구로 자원해서 갔죠. 부산 최고의 강자인 허삼수가 버티고 있었는데. "군사 독재정권의 최고 실세와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이겠다"는 논리를 폈죠.
그런데 돈이 있습니까, 조직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었죠. 당시 내가 부산상고 53회 동기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졸업 20주년 기념행사를 한 직후라 동기생들의 연락처를 많이 갖고 있었죠. 그래서 동기생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소주 한병을 사더라도 동구 산복도로 구멍가게에 가서 사면서 노무현에게 한표를 찍어달라 부탁하라고. 정말 열심히 했고, 그렇게 해서 노무현 의원이 탄생했어요.
청문회 스타 된 뒤 의원직 사퇴서…최형우·김동영 등 만류로 번복서
그리고는 청문회 스타가 됐죠. 주위에 친구들이 "너 이제 대통령해도 되겠더라. 국회의원 중에 니보다 똑똑한 사람이 없더라"며 부추겼어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무척 힘들어했어요. 전국 곳곳에서 밤낮으로 민원이 들어왔어요. 노무현 정도라면 무엇이라도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유명하기만 할뿐 초선 국회의원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심한 무력감에 빠져 정말 힘들어했어요. "국회의원 그만두고 시민사회운동을 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훨씬 보탬이 되겠다"는 말도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경남 거제도의 무인도로 친구를 데려가서 텐트를 치고 이틀 동안 쉬다 왔어요. 많은 이야기를 하고 많은 생각을 했죠.
그런데 돌아와서는 국회의원 사퇴서를 내고 잠적 해버렸어요. 권여사는 말할 것도 없고, 와이에스까지 전화를 해서 친구를 찾아달라고 하더군요. 일주일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어요. 그러다 결국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틀 뒤 새벽에 권 여사가 전화를 해서 "새벽에 건호 아빠가 돌아와서 지금 자고 있는데, 좀 와주세요"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김해공항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갔어요. 우연히 그 비행기에 문재인 변호사도 탔어요. 목적지가 같더군요. 친구 집에 도착해서 조금 있으니까 민주당 의원 12명이 찾아왔어요. 최형우, 김동영 의원 등이 있었죠. 서명만 하면 되는 사퇴 번복서도 만들어 왔더군요. 의원들이 친구에서 설득을 하는데, 그때 친구의 어머니와 장모가 함께 부엌에서 귀를 쫑긋 세운 채 설겆이를 하고 있었어요. 마음이 참 안됐더라구요. 내가 담배나 한대 피우자면서 친구를 밖으로 불러 냈어요. 사표를 내면서 어머니에게 뭐라고 했냐고 물으니 "몸이 아파서 잠시 쉬기로 했습니다"라고 했다더군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자식 몸이 아파 일을 그만둔다는데 말릴 부모는 없겠지만, 앞으로 너그 어머니하고 장모는 오래 못살거다. 니가 이러는 것을 보면서 어찌 오래 살겠노. 친구가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그때 최형우 의원이 쫓아나와 "친구 이야기가 백번 맞다"며 우격다짐으로 번복서에 사인을 받아냈어요. 그런데 깜짝 놀랐어요. 당시 원내총무이던 최형우 의원이 친구에게 갑자기 큰절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번복서를 쫙쫙 찢어버려요.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노 의원. 어차피 사인한 것, 내가 불러줄테니 자필로 번복서를 써주소"라는 거예요. 그래서 자필로 번복서를 썼고, 최형우 의원은 그것을 들고 돌아갔어요. 김동영 의원은 밥을 사겠다며 우리를 식당으로 데려갔어요. 김동영 의원이 식당에서 하는 말이 "야당 오래하면 친구들에게 손을 벌릴 수 밖에 없고, 결국 가까운 친구들의 껍데기까지 벗기게 된다"며 정치인생의 회한을 털어 놓더군요.
부산시장 출마전 캐나다 여행…환경보호 눈떠
1992년도에 부산 동구에서 다시 출마했는데, 떨어졌어요. 언론에서 호화요트 기사를 낸 것이 이때였죠. 빈민가 밀집지역에서 분위기가 확 돌아섰지요. 1995년에는 부산시장 선거에 나가 또 떨어졌어요.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부인 앞에서 각서까지 썼다더군요.
부산시장 선거에 나가기 전인 1994년 여름 내가 제안을 해서 친한 친구들끼리 부부동반으로 10명이 열흘 동안 캐나다에 여행을 갔어요. 예전에 함께 계모임을 하던 친구가 캐나다 캘거리에 이민을 가서 살고 있었거든요. 노 대통령은 일본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해외에 나간 것이죠. 이때 친구가 환경보호에 눈을 떴어요. "이렇게 큰 나라도 자연을 보호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는데, 조그만 우리나라는 정말 열심히 자연을 지켜야 하겠다. 야생동물을 지키는 것도 그렇고, 여기가 정말 모범사례다"하면서 쉴 새 없이 환경보호를 강조했어요.
골프장도 이때 처음 갔어요. 해양수산부장관이 되고 나서 처음 골프를 쳤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그 전에 캐나다에서 한번 골프를 쳤죠. 이때까지 노 대통령은 골프에 대한 거부감, 나쁜 시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캐나다의 골프장을 가보고는 자연환경을 유지하면서도 골프장을 만들 수 있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죠. 권여사도 "우리도 귀국하면 골프를 배워요"라고 친구에게 권했죠. 실제로 권여사는 귀국해서 골프를 배웠는데, 친구는 바빠서 배우지 못하다, 해수부장관이 된 뒤에 배웠죠. 장관이 된 직후에 친구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친구야 머리 좀 올려도"하더군요. 정식으로 골프에 입문하겠다는 것인데, 당시 내가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창원에 있는 동기생인 강태룡 회장에게 연락해 대신 머리를 올려주게 했지요.
2001년 들어 하루는 그래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말렸죠. 안된다고. 그런데 경선을 거쳐서 하기 때문에 될 수도 있다고 해요. 그래서 대통령 후보는 될 수도 있겠다며 웃고 말았죠. 그런데 진짜로 출마 선언을 했어요. 결국 나는 모든 일을 전폐하고 도왔어요. 동문들에게도 도움을 청하고요. 모두가 열성적으로 했어요.
내가 또 물었어요. 어떤 대통령이 되고 싶냐고. 그런데 이렇게 답을 해요.
"이웃집 아저씨같은 대통령 되고 싶다"
"이웃집 아저씨같은 대통령이 되고 싶다. 경호원 한두명만 데리고 대학로에 가서 포장마차 아무 데나 들어가서 닭똥집에 소주를 마시는 대통령. 옆자리 손님과 편하게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야기 나누는 대통령. 그런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
국민들은 그런 권위 없는 대통령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더니 "권위를 확 낮춘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당선되고 나서도 도와준 많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안해요. 주변 사람에게 고맙다는 전화라도 해라고 시켜도 하지 않아요. 솔직히 많은 사람들이 섭섭해했죠. 결국 선거 캠프에 참여했던 고등학교 한해 후배 최도술씨에게 시켜서 감사편지를 사람들에게 보내게 했어요. 그제서야 사람들 마음이 많이 녹았어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것을 가식으로 생각하더군요. "고마움은 마음 속에 가지고 있어야지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에요. 정치인은 그러면 안되는데 아쉽더군요. 그 바람에 나는 사람들을 이해시키느라 애를 먹었죠.
그런데 대통령에 취임한 뒤 동기생들을 청와대에 초청한 일이 있었어요. 한사람 한사람과 옛날에 함께 겪었던 이야기들을 하는 거예요. 학교 다닐 때 다른 친구가 쓴 연애편지 내용까지 기억하고 있더라구요. 신기할 정도였죠.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만 보면 서로 통하는 신뢰,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죠.
"언론권력의 폐해 누가 막겠느냐"
대통령에 당선되고 부산에 처음 왔을 때 롯데호텔 객실에서 1시간 동안 만났어요. "청와대 들어가면 우리는 영영 못만나는 것 아이가? 앞으로 우찌 연락하모 되노?"하고 물으니까 "내 수행비서한테 전화해라. 내가 24시간 안에 니한테 전화하모 되는 것 아이가"라고 했어요. 그리고 이 약속을 한번도 어기지 않았어요. 내가 전화를 걸면, 몇시간 뒤라도 반드시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고?"하고 물어요. 무슨 일이 있겠어요.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 잠깐 하고, 힘내라 하고 그러는 것이죠. 그런데도 반드시 전화를 걸어주는 친구가 정말 고마웠어요.
친구는 남에 대해 폄하나 나쁜 말을 하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가능한 남의 장점을 보려고 노력했죠. 누가 다른 사람의 단점을 이야기 하면 "아니다. 장점이 더 많다"고 했죠. 그러면 말한 사람이 머슥해져요. 언론에서는 말을 함부로 상스럽게 한다고 비판했지만, 본인은 다른 사람이 잘 알아듣게 쉽게 말하는 것을 즐겼죠. 한마디를 해도 가슴에 와닿는 말, 평범하지만 이해하기 쉬운 말을 한 것이죠.
대통령이 되고 나서 말을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많이 말렸어요. 언론과도 잘 지내라고 했어요. 그런데 "언론권력의 폐해를 누가 막겠느냐. 내보고 대통령 하지 말라는 말이냐"며 본인의 소신을 꺾지 않았어요. 오히려 지방언론도 활성화시키고, 다양한 언로를 만들려고 했죠.
퇴임하기 1년 전쯤에 내가 물었어요. 집도 없는데 다음에 어디에서 살 거냐고.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더군요. 내가 그랬어요. 부산에 내려와라. 살아보니까 부산이 제일 살기 좋더라. 지역균형발전을 부르짖은 대통령이니까 부산으로 내려와서 살면 좋지 않느냐. 옛날에는 선비가 벼슬에게 물러나면 고향으로 내려가 후진을 양성하고 고향을 지키고 그러지 않았느냐고 했죠. 그랬더니 친구가 "야, 니 말이 맞다. 부산에 집을 한번 알아봐도" 하더군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마땅한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봉하마을로 결정했죠.
"나는 그 시계 구경도 못했다"
돌아가시기 전 검찰 수사가 진행될 때는 매일 찾아가서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는데, 친구가 전화로 그래요. "기자들이 많으니까 찾아오면 괜히 얼굴 꺼실린다. 오지마라."
돌아가시기 열흘 전에 한번 보고싶다고 연락이 와서 생선회를 준비해서 부부가 함께 봉하마을로 갔어요. 두 부부가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했죠. 일부러 검찰 수사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힘이 없어 보였어요. 허리가 아파서 오래 앉아있지 못하더군요. 중간중간에 일어나서 잠시 몸을 풀고 다시 앉곤 했어요. 오래 있어서는 안되겠다 싶어 "이제 갈란다" 했더니 "그래 가라. 나도 글 써야 한다"고 했어요. 권여사가 "내가 이 양반 힘들게 만들어 미안해요"라고 하더군요. 친구는 박연차 회장에게서 받았다고 언론에 보도된 1억원짜리 시계에 대해 "나는 그 시계 구경도 못했다"하면서 "내가 주변 사람들을 너무 힘들게 했다" 하더군요. 친구는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거짓말을 못해요. 그 친구가 몰랐다면 진짜 몰랐던 거예요. 돈 받은 사실을 말하면 불호령이 떨어지니까 권여사가 말을 못한 것이죠. 시중에서는 부부간에 모를 리가 있나라고 하지만, 그게 상식이지만, 이 부부에게는 그렇지 않았어요.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가던 날도 찾아가서 만났어요. "정치라는 것이 정말 어렵다. 주변 친구들 주머니나 털고"라며, 나를 가리키며 측근들에게 "저기 골병 든 친구 하나 있네"라고 하더군요. 옛날에 김동영 의원이 했던 말인데, 그 말을 결국 친구가 하게 되더군요.
정치인에게 후원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경제적으로 도와줄테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손 벌리지 말고 정치에 전념하라는 것 아닙니까? 언론에서 줄곧 박연차씨와 강금원씨를 노 대통령의 후원자라고 보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와서 왜 이럽니까?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답답합니다.

.